최근 며칠 새, 한 방송사를 통해 너무나 엄청난 일들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나왔습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 개헌추진 선언을 하던 바로 그 날 저녁, JTBC 뉴스룸을 통해 최순실씨가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태블릿 PC가 이 방송사 기자에게 입수 되어, 그 파일의 내용 중 일부가 언론 보도를 통해 나온 것이지요. 그동안 '국가서열 1위 최순실' 등 '설'로만 존재하던 사실들이 이른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그렇게 대한민국을 강타했습니다. 온라인 실검 최 상위권에 하야, 탄핵 등의 단어들이 올라가는 등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해외 언론에 자세히 보도되고 있는  이 사태에 우리 국민들은 '부끄러워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다'고 하소연합니다. 대한민국의 민주공화정 시스템과 국민의 자부심은 사실상 심각한 붕괴상태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의 '民'자는 우리 나라가 민주공화국임을 나타내 준다는데, 우리에겐 과연 대한민국의 '민'자를 국호에 달 자격이 있는 걸까요? 대한민국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지금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제 [세상을 보는 눈]으로 살펴 봅니다.


1. 오늘의 대한''국 ... 어디로 가고 있나요?


    일단, JTBC의 보도로 가장 큰 이슈가 된 것이 '대통령의 연설문' 사전 유출과 최순실의 '첨삭 수정'입니다. JTBC 기자에 의해 대통령의 연설문이 발표되기 전 최순실씨에게 전달되어, 최씨의 첨삭과정을 거쳐 대통령이 발표하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통령 취임 전후부터 2014년 무렵까지의 파일자료가 공개된 겁니다. 이 파장이 커지자, 대통령이 신속한 '사과'를 했지요. 하지만 '더 잘하기 위해 본인이 어려울 때 함께 해준 친분있는 지인에게' (연설문에 관한) 도움을 구했다'는 식의 1분 30초짜리 변명에 가까왔다는 게 세간의 평입니다. 이 정도 사과에서 사태가 마무리되었으면 하실 박대통령의 바람과 달리, 각 언론사마다 전직 공무원, 미르/K재단 전 임직원 등 최순실로 인해 쫒겨나거나 스스로 퇴직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줄줄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어, 언제 어디서 더 충격적인 보도가 나올지 걱정스러운 정도가 되었습니다.

박대통령 사과 발표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연설문 유출과 관련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시작하기 전 인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67441.html#csidxf225f0fae20d9448a6735347df8d1e4

   이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으로 추정되는 후속보도는 한겨레에서 접촉하고 있는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의 인터뷰입니다. 지금까지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아직 사실로 드러나지 않은 내용이 90%정도 된다고 하며,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실들에 대한 근거자료를 녹취록, 각종 문서, 녹음 파일의 형태로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JTBC도 이미 그 태블릿 PC에 연설문만이 아닌 민감한 외교문서, 국방관련 문서 등이 발견되었다는 보도를 했고,정밀 분석을 거친 후 추가적인 보도를 하겠다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특정인의 주장에 불과한 '설'들이 사실로 밝혀지고 있는 지금, 아직 '설'들로 남아 있는 그 내용들에 근거가 뒷바침될 때, 그땐 어찌될까요? 어쩌면, 어제 대통령이 한 어정쩡한 '사과'는 본인에게 더 큰 독으로 돌아올지 모르겠습니다.

    이 와중에 최순실씨는 독일에서 세계일보 기자와 단독 인터뷰를 열어, 박대통령의 '사과'에서 인정한 수준의 내용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모른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는데요. 이 분들의 기대와 달리, 언론에서 입수하였으나 그동안 차마 기사화 시키지 못한 이야기들이 민간에서 횡행하고 있는 상황이고 일부 야당 정치인들에 의해 인용되어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 시작하고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최순실이 단독으로 대통령의 일에 개입한 부분도 있겠지만, 무속신앙에 바탕을 둔 '팔선녀'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어서 이들의 의견을 취합한 형태로 나라의 인사, 외교, 국방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을 박대통령에게 전달(차마 지시라고까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아직까지는요...) 해 왔다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었던 이야기들이 언론을 통해 봇물 터지듯이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최순실씨 인터뷰오늘(27일)자 아침 세계일보에 실린 최순실씨 인터뷰 기사

    우리 국민들이 자괴감을 갖고 도무지 얼굴을 들 수 가 없다는 부분이 여기 있습니다. 단순히 사적 채널이 국정을 좌지우지한 것도 모자라 그 사적 채널이 샤머니즘에 기반을 둔 이단에 가까운 종교적 조직이라니요? '우리 나라가 1970년대 개발독재 시대로 돌아간 줄 알고 있었더니 청동기 부족국가 신정(神政)정치 시대로 가 있었다'는 어느 인터넷 댓글의 내용은 우리 국민들의 정신적 충격과 자괴감의 깊이를 가늠케 해 줍니다. 인기 드라마 '주몽'에서 보던 이야기를 21세기 뉴스에서 보고 있게 될 줄을 상상이나 해 보셨나요?

    무엇보다 저는 북쪽에서 우리를 비방하는 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솔직히, 독재시대로의 회귀를 꿈꾸는 사람들이 도사리고 있긴 해도, 국민들이 피와 땀으로 건설하고 지켜낸 경제대국과 이 민주공화정은 3대 세습체제에 짓눌려 있는 북쪽에 비하면 우리의 자랑 아닌가요? 그러나 이제는 저 쪽에서 '무당의 지배를 받고 있는 놈들'이라고 우리를 비난했을 때 반박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 너무 분통하네요. 국정원이 제공한 안가에 머물고 있을 태영호 전 북한 영국 공사관은 현재 한국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는 '신정(神政) 정치' 기사까지 제공받고 있을까요? 넘어온 결정적 사유가 뭘 진 몰라도 3대 세습체제에 대한 환멸도 있긴 있었을 텐데, 목숨을 걸고 넘어 온 곳에서 무당이 섭정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2. 오늘의 대한''국은 어떻게 만들어져 왔던 것인가요?   

    이렇게 오늘 우리가 붕괴된 모습을 보고 있는 대한민국 민주공화정치 체제는 우리 조상들이 일제로부터 저항하며 만들어 내고 (비록 연합군의 승리로 주권을 회복하였지만), 우리 선배들이 피땀으로 지켜낸 것입니다.

    1919년 3월 1일 삼일 만세운동은 국내에서 온 민족의 자주독립 열망을 확인한 사건이었습니다. 민족지도자들은 이를 계기로 해외에 독립운동을 위한 거점을 마련하고 이 조직을 망명정부형태의 준정부 구조로 가져갑니다. 바로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는데요. 경술국치(1910년)로 소멸한 대한제국의 왕족은 일본 귀족화 되어 더이상 조선 민족 독립의 열망을 담아낼 수 없었고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임시정부를 세우고자 했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이 망명정부의 형태를 왕정복고가 아닌 민주공화정으로 하기로 한 것이지요. 그런 연유로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은 당시 중화민국 군의 협조하에 자체 군 조직을 창설하여 해외에서 연합군의 대일 전투에 참전하였고, 한반도 진공작전을 준비하는 등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본을 무찌르고자 많은 준비를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첫돌 1월 1일, 임시정부 요인 58명이 상하이에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둘째줄 왼쪽에서 7번째가 이승만, 첫째줄 왼쪽에서 3번째가 김구, 이승만 오른쪽으로 4번째가 안창호. (출처: 나무위키) 원본소스 : https://namu.wiki/w/%EB%8C%80%ED%95%9C%EB%AF%BC%EA%B5%AD%20%EC%9E%84%EC%8B%9C%EC%A0%95%EB%B6%80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 예하 광복군이 한반도 진격의 꿈을 이루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고 연합군이 승리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라고 하지요. 이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는 승전국의 지위도 얻지 못하고, 한반도를 실효지배하는 정부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래도 3년간의 미군정 끝에 1948년 8월 15일, 비록 남한만의 단독 정부이지만, 한반도 내에 우리의 실효 지배 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근거가 되는 제헌헌법은 1948년 7월 17일 제정 반포되는데,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함을 명문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룩한 대한민국의 민주공화정의 역사는 쉽게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부는 무리한 장기집권을 위해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과 정부통령 선거의 부정(이른바 3,15부정선거)을 저지르게 됩니다. 민주공화정이 붕괴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이를 지키려고 시민, 학생들은 죽음을 불사한 저항을 했고, 침묵하던 시민들의 대규모 가세로 인해, 이를 총칼로 막던 자유당 정권의 장기집권 기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기붕 부통령은 자살,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게 되죠. 이를 우리는 4.19 혁명(1960년)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이로부터 약 1년 뒤, 현 박근혜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소장이 군부를 이끌고 쿠데타(5.16쿠데타)를 감행하여, 국민에 의해 선출된 민주당 정권을 붕괴시키고, 군정 실시 후 스스로 대통령에 오르게 됩니다. 그도 장기집권을 기도하여 1972년 스스로 군대를 서울 시내에 끌고 들어와 친위 쿠데타(10월 유신)를 일으키고 이른바 '유신 헌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스스로 종신 대통령이 됩니다. 역시 국민들은 저항하지만, 유신정권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각종 긴급조치와 계엄령을 발동하여 이를 틀어 막습니다. 이번에는 4,19혁명처럼 국민이 승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부하인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10.26사태, 1979년)하는 돌발 상황에 의해 유신체제가 종말을 맞게 됩니다.

    국민에 의해 민주정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한계는 신군부라고하는 또 다른 군부세력이 상황을 장악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2,12 사태(1979년)라고 불리우는 하극상을 일으켜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등을 체포하고 실권자에 오릅니다.  민주정치 체제의 회복을 기대했던 국민들은 신군부의 등장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의 경우, 신군부의 총칼 앞에 이른바 '서울역 회군(시위대의 자진해산을 의미합니다.)'을 계기로 사실상 와해되었고, 다른 대부분의 지역 사정도 비슷했습니다. 다만, 전라남도 광주 (오늘날 광주광역시) 지역만은 민주정치의 회복을 갈망하는 시민들이 무장하여, 이를 진압하던 계엄군과 지역 경찰을 몰아내고 시내를 장악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신군부는 이를 폭도로 규정하고, 특수부대 등을 투입해, 무력 진압(1980년 5월 27일)으로 끝을 맺게 되었지요. 민주정치 체제 회복을 위해 무장 투쟁을 벌였던 이 사건을 오늘날 우리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한 어머니가 6년 전 광주항쟁에서 살해당한 아들의 묘 앞에서 오열하고 있는 사진입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광주학살'과 정적에 대한 내란음모 누명, 가택연금 등으로 권력기반을 다진 신군부의 전두환 장군은 7년 단임 대의원 간선제를 골자로하는 개헌을 단행하여 대의원들을 체육관에 모아 놓고 스스로 대통령에 오르게 됩니다. 유신시대에 버금가는 폭압적 정권에 민주정을 갈망하는 시민사회는 잠시 숨을 죽였지만, 7년 임기가 끝나갈 무렵 '직선제 개헌'을 모토로 하는 민주정 회복 요구가 점점 거세지게 됩니다. 당시 연세대 학생 이한열씨가 민주회복을 위한 시위를 벌이다가 진압 경찰이 쏜 직사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약 한달 뒤 죽음에 이르게 된) 사건을 계기로 전국민적인 민주화요구가 빗발치게 됩니다.(6월 항쟁, 1987년) 신군부 세력은 다시 한번 강경진압을 검토하지만, 1년 뒤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계엄과 군투입은 쉽지 않은 선택지였습니다. 결국,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체육관 대통령'이 될 예정이던 노태우 여당 대통령 후보가 '직선제 개헌'을 전격 수용하는 형태로 사실상의 후퇴를 하게 됩니다.(6.29선언, 1987년) 이때 여야 합의와 국민투표로 5년 단임 및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골자로 해서 만들어진 헌법이 현재의 우리 헌법입니다. 87년 발효되어 대통령이 여섯 분 탄생했지요. (그래서 우리의 현행 정치체제를 '87년 체제'라고도 부릅니다.)

1987년 6월 9일 당시 연세대 학생이던 이한열씨가 호헌철폐 및 직선제 개헌을 위한 시위 도중 머리에 직사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정부를 수립한 이후로 민주공화정에 위기가 닥칠때 마다 날아오는 총탄에도 몸을 아끼지 않은 우리의 선배들의 선구자적 행동으로 버텨왔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결정적인 순간에는 묵묵히 현업에 종사하던 보수적인 서민 대중들이 민주정치 회복을 요구하는 대열에 합류하면서 민주공화정이 지켜져 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학생 등 선구적인 분들이 불을 지핀 후, 침묵하던 다수의 대중들이 '이건 도저히 아니다.'라고 생각할 때 다수 국민의 힘에 의해 민주정이 회복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4,19혁명'과 '6월 항쟁'이 그 승리의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3. 우리는 앞으로 대한''국의 '民'자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전술한 바와 같이, 또 우리가 다 같이 보도를 접하고 패닉에 빠진 바와 같이, 우리는 지난 세대가 맞이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민주공화정에 대한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을 좀 달리 해 봅시다. '민주공화정'에 대한 환상부터 버려야 합니다. 민주공화정은 절대 완벽한 정치체제가 아닙니다. 중우정치라는 말이 있지요? 고대 그리이스 직접민주정 시대의 이야기인데, 대의민주정 시대인 오늘날의 의미로는 '우매한' 국민이 우매한 지도자를 택한다는 이야기쯤 될까요? 지금 개헌 논의가 있는데, 어떤 정부형태, 권력형태를 갖춰도 아래와 같은 지도자와 그 추종자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한 7푼 정도의...)좀 모자라는 정치 지도자라도 이미지관리를 통해서 얼마든 최고 권력자로 나올 수 있죠. 또 우매한(?) 국민이 그 모자라는 지도자를 열렬히 지지하고, 그것을 보면서도 (그 지도자가 좀 모자란지 알면서도) 지지가 있고 잇권이 있기에 그 주변에 똥파리들도 꼬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항상 최선의, 최상의 지도자를 뽑는 것을 보장하는 제도가 아니다. 최악의 지도자가 최악의 선택을 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체제이다.' 그렇습니다. 선거에 의한 국민의 선택이 실패할 수 있는 것이 민주공화정입니다. 우리가 자괴감을 갖지 않아도 되는 이유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선출된 지도자가 최악의 선택을 했다는 것이 밝혀졌을때, 민주공화정의 구성원인 우리는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민주정을 회복했을때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 자랑스러워 할 수 있습니다. 저들의 저항에 밀려 이 시기를 놓치게 된다면, 우리는 무당에 의한 지배를 용인한 국민으로 전락합니다. 그때는 정말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독일국민이 히틀러에게 선거로 권력을 주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권력이 나찌즘이라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이를 통제하지 못한 것도 잘 알고 있지요. 오늘날 독일은 이 시대에 대한 반성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으며, 통렬히 부끄러워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뻔뻔한 어떤 섬나라도 있지만요.)

최근까지도 나치 독일의 만행을 뼈저리게 반복해서 반성하는 독일 메르켈 총리 (출처 : 연합뉴스TV)

    그런 의미에서 (일본과 이승만을 추앙하는 뉴또라이 뉴라이트 같은 분들 말고) 이 땅에 제대로 된 보수가 있다면, 이 사태에 밤잠이 안 와야 합니다. 제대로된 보수라면 소위 진보들이 나서기 전에, 민주공화정이 무너지는 현 상황에 가장 먼저 분개하고, 가장 먼저 엄격한 법치의 잣대를 들이대고, 정치적 책임을 묻고, 신속히 대안 권력을 논의하고 추대하여 권력의 공백이 없도록 안정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대로된 보수가 지켜야할 가치입니다.

    이 나라의 국민들과 정치인들이 대한민국의 '民'자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저는 지켜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 평범한 국민들은 때로는 박근혜대통령 같은 분을 선거에서 뽑기는 해도, '민주공화정을 스스로 지켜내고 누리고 있는 국민이다'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 국민의 뜻을 대리하는 위정자들은 추상같은 법집행을 통해 국정을 농단한 자들에 상응하는 벌을 주고, 국민이 부여한 통치권을 사사로이 연을 맺은 한 자연인에게 집중적으로 넘겨 준 현직 대통령은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인 책임을 반드시 지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 민주정회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여론주도층 핵심보수와 침묵하는 다수의 보수... 이 분들이 민주공화정 회복을 위한 적극적 행동에 나선다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제 박근혜 대통령은 하야하지 않더라도, 탄핵 여부를 떠나, 레임덕을 넘어 '식물 대통령' 수준까지 갈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인물을 내세워 국정 공백이 없도로 해야 합니다. 이런 역할을 해 줄 여론 주도층 핵심 보수들의 역할이 간절히 필요한 시점입니다. 박대통령을 설득하여 진행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여당은 그럴 실력도 안되고, 그럴 생각도 없지요. 야당이 이야기하면 박대통령은 안듣습니다.

    또, 진정한 보수라면 박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포함하여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막아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내부에서 민주공화정을 붕괴시키는 세력을 추상같은 법집행으로 다스리자는 정치인과 그 세력에 힘을 실어 주셔야 외부에서 우리 민주공화정을 얕잡아 보지 못합니다. 또 그래야 우리 국민의 자존심을 세우고 대북 정치체제에 대한 우월성을 유지시켜 줄 수 있습니다.

    박대통령도 철저한 수사가 이루어져 사실관계가 명명백백히 드러나도록 하고 드러나는 위법행위에 대한 (하야 혹은 탄핵을 포함한) 정치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고 퇴임 후 형사적 처벌을 받도록 보수 여론 주도층에서 나서 주어야 합니다. 물론 수사는 빨리 진행하되 책임은 국정공백을 메우기 위한 대안이 선행된 뒤에라야 하겠지요. 이래야 진정한 보수입니다.

    대한민국 참보수들의 결정적 의견 수렴과 행동을 기대하며, 그 분들이 무너진 우리 민주공화정의 역사를 다시 세워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4.19혁명과 '6월 항쟁' 때처럼 말이죠. 자, 이제 자괴감과 수치심은 잠시 접어 두고, 모든 국민이 힘을 모아 민주공화정을 회복해 냅시다. 그리고 만약 실패한다면, 그때 부끄러워 합시다.

 

P.S. 이 글의 구성 방향과 동떨어진 이야기라 따로 기재합니다. 우병우 민정수석에 대한 특종을 연일 보도하던, 조선일보는 얼마 후, 급소를 반격당합니다. 국정원의 막강한 정보력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 주필의 비위가 어느 여당 국회의원의 입에서 폭로되면서 그 주필이 펜을 놓았지요. JTBC에 대한 반격이 예상되는 시점입니다.

Posted by truerain
l

   지난 주말, 그러니까 10월 22일과 23일, 1박2일에 걸쳐 저희 부부 결혼기념일을 기념하는 국내 가족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 글은 지난 제1편 공주여행편에 이은 두번째 글로써 부여지역 여행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공주 황새바위 천주교 성지를 둘러본 후 저희는 부여로 넘어와서 하루를 묵을 숙소로 향했습니다. '부여관광호텔'에 미리 예약을 해 놓아서 바로 체크인만 하면 되었죠. 부여 읍내 시가지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 조용하고 풀내음을 맡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읍내 시가지하고 불과 차로 3분 정도 이내에 위치한 괜찮은 곳이었습니다. 와이프가 온돌방을 예약했는데 생각보다 널찍하니 세 식구가 자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네요.

 

   오후 4시쯤 도착해 짐을 대충 풀고, 약간의 꿀잠을 자고 일어나, 맛집으로 점찍어 둔 '사비마루'라는 곳을 찾아 갔습니다. 이 곳은 부여 읍내 한 복판에 있었는데, 다음 날 보니, 부소산성 관광지 주차장 바로 건너편에 있는 곳이더군요. 다른 분들의 블로그를 보고 찾아 갔는데, 부여 읍내의 많은 맛집들이 이곳 부소산성 입구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곳 '사비마루'의 추천 메뉴는 바로 일본에서 '규가츠'라고 불리는 소고기 즉석 구이와 꼬치요리, 그리고 초밥입니다. 저희는 위의 모든 것을 맛볼 수 있는 모듬세트를 먹어 봤는데요. 가격은 32,000원에 다양한 꼬치요리와 소고기 300g, 초밥 8개 정도의 한 접시 등을 된장찌게 등의 반찬과 더불어 먹을 수 있는 메뉴였습니다.

   일본식이라 그런지 저희 가족이 먹기에는 다소 양이 적은 듯 한 것이 단점이랄까... 맛은 괜찮았습니다. 초밥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생선 초밥, 유부 초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초밥에 썬 양파가 올려져 있고 한 켠에 와사비가 덜어져 있어서 기호에 따라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고기를 구워서 초밥과 함께 먹는 용도인 것 같습니다. 주차는 건물 옆으로 진입하여 뒤편으로 돌아 들어가면 이중주차로 6대 이상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 있어서 편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간단히 맥주를 마신 후 기절하듯 잠들면서 여행 첫날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이튿날, 9시 반도 넘어 다소 늦게 숙소를 나온 저희 일행은 점찍어 둔 부여 맛집 두 번째 집으로 아점을 먹으러 향했습니다. 저희 숙소보다도 더 외곽쪽에 롯데 리조트 근처에 '백제해장국'이 그 곳이었는데요.

 

   다소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빈 테이블이 거의 없다시피할 정도로 손님이 북적였습니다. 아마 더 일찍 갔다면 밖에서 줄 서서 기다리다 먹었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백제해장국'집에 가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백제해장국을 주문해 먹으라는 어떤 블로거님의 조언에 따라 백제해장국을 먹어 봤습니다. 일종의 모듬해장국이더군요. 양, 내장, 선지 등이 골고루 들어간 진한 국물의 해장국이었습니다. 국밥에 중요한 김치도 괜찮았고 반찬으로 주는 날 양파, 고추 등의 야채도 신선했습니다. 

   가격도  8천원으로 수도권에 비하면 비싸지 않은 정도였네요. 그 가격도 지난 10월 1일부터 1천원씩 올린 가격이었다니... 아쉬운 점은 내장의 양이 다소 적은 것이었는데, 가격을 조금 더 인상하더라도, 건더기를 조금 더 푸짐하게 하시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부여지역에서 돌아볼 곳들은 시간관계상 부소산성, 서동공원 궁남지, 정림사지 5층석탑 정도만 보기로 하였습니다. 아점도 든든히 먹었겠다. 소화도 시킬 겸 부소산성 트래킹을 첫 코스로 잡았습니다.

   부소산성은 전날 둘러본 공주 공산성과 달리, 성벽은 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코스도 성벽을 따라 순환하는 공산성과는 달리, 보통 등산이나 트래킹 하는 듯한 산길의 느낌이었습니다. 곳곳에 빈대떡과 막걸리를 파는 가게도 있고.. 수도권의 여느 산 입구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더군요. 그래도 산성 내부는 순환 산책로의 형태로 되어 있어서, 산성 정문, 낙화암, 고란사, 태자골숲길, 영일루, 삼충사를 거쳐 다시 부소산성 정문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해 걸었습니다. 

   낙화암에서 고란사/선착장으로 향하는 길은 가파르고 유난히 단체관광객들이 많아, 다소 산만하고 쾌적도가 떨어졌지만, 다른 코스들은 특별히 가파는 길이 없고 한적하여, 여유로운 마음으로 산책을 즐길 수 있었으며, 특히 태자골숲길의 경우 바닥에 돌을 깔지 않아, 흙을 밟으며 가을 산길을 산책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소산성을 나와 향한 곳은 서동공원 내에 있는 궁남지 정원이였습니다. 서동공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궁남지 쪽으로 향하니, 작은 연못이 옹기종기 있고 그 연못들 안에 연꽃들이 피어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바로 궁남지를 크게 에워싸는 형태로 엄청난 규모의 연지(蓮池)를 조성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지난 여름에 왔다면 연꽃들이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을 텐데, 이 가을에 보니 좀 흉물스럽더군요. 하지만 군데군데 작고 예쁜 수련 꽃들이 피어 있어 포룡정으로 향하는 길에 즐거움을 더해 주었습니다.

   궁남지는 다음 주에 열린다는 꽃 축제 관계로 다소 산만한 모습이었는데요. 나들이 나온 군민들과 관관객들에게는 더 많은 포토존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정림사지5층석탑이 있는 정림사지였는데요. 정림사지박물관 근처에 주차를 하고 걸어 내려가니, 5층석탑을 보려면 입장료 개인 1,500원, 어린이 700원의 요금을 내야 한다네요. 박물관을 볼 것도 아니고, 잔디나 깔려있는 정림사 터를 볼 일도 도욱 없는데, 5층석탑 잠깐 보자고 입장료를 낼 이유가 없어서 그냥 멀리 담장 밖에서 보고 가기로 하였습니다. 이때 아이폰 카메라의 줌 기능을 좀 망원경처럼 써 보니 요긴하더군요.

   이렇게 1박2일의 공주, 부여 여행을 마쳤습니다. 다행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르기 전까지는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아,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 왔습니다.

Posted by truerain
l

   지난 주말, 그러니까 10월 22일과 23일, 1박2일에 걸쳐 저희 부부 결혼기념일을 기념하는 국내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물론 아들도 포함해서요. 토요일 새벽 5시 반쯤 출발하여 일요일 저녁 무렵에 집에 도착했으니, 비교적 알차게 다녀왔는데요. 올라오는 길이 꽤 밀리고 비가 주적주적 와서 조금 힘들기도 했습니다.

   토요일 아침식사를 안성휴게소에서 국밥으로 때우고 서둘러 도착한 곳은 공주 공산성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각 지자체들이 트래킹 코스를 개발하여 '무슨무슨 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쟁이 있었는데, 이곳 공산성 주변도 '고마나루명승길'이라는 이름으로 트래킹코스 안내가 있더군요.  고마(곰)나루는 공주의 옛 이름 '웅진(熊津)의 순한글 이름입니다.

 

   저희는 그냥 공산성 둘레를 한 바퀴 돌고, 차로 국립공주박물관까지 이동하여, 그 주변에 있는 한옥마을, 무령왕릉/송산리고분군 등을 둘러 본 후 황새바위를 보는 것으로 하루짜리 공주 일정을 잡았습니다.

   공산성은 성곽의 보존과 유지관리가 비교적 잘 되어 있는 산성이었습니다. 성곽을 따라 주욱 한 바퀴를 돌면, 여유있게 주변을 보며 걸어도 한 시간 반 정도면 되는 코스였습니다. 동서남북 방위에 따라 성을 지켜주는 4신(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깃발과 성문, 망루 등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고, 금강을 접하는 곳에는 시원하고 탁 트인 강주변과 공주시내의 전경이 들어와 볼 거리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여행지에서의 트래킹을 좋아하는 제 성향에 맞는 곳이었습니다.

   공산성 트래킹을 마치고 나니, 몸에 약간의 땀이 나 있고 노곤함이 느껴져서 근처 '커피향기'라는 찻집에서 잠시 쉬며 망고 대패 빙수 하나와 카푸치노 커피 한 잔을 주문하여 먹었습니다. 가벼운 운동 뒤여서 그런지 너무 맛있더군요.

커피향기 카푸치노와 망고 대패 빙수공산성 트래킹을 즐기고 오신 분들께 이곳 대패 빙수를 추천합니다. 가격은 1만원으로 기억되네요. 망고 맛 외에 블루베리 맛도 있었을 겁니다.

 

   달콤한 휴식 후 일정을 재개했습니다. 국립 공주박물관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반 정도 되더군요. 백제 시대의 유물들, 주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유물들의 진품 혹은 모조품들이 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옥내외 전시물들을 모두 꼼꼼히 둘러 보는데 약 1시간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서울의 국립 중앙박물관이나 타이베이의 고궁박물관 등에 비하면 정말 아담하고 조촐한 박물관이네요.

국립공주박물관 공산성 미니어처국립 공주박물관 구내에 전시된 공산성 축소 모형입니다. 공산성 트래킹을 먼저 다녀와서 그런지, 미니어처 위의 장소 한 곳, 한 곳이 다 익숙하네요.

 

   이제 차를 국립 공주박물관에 두고 바로 옆 한옥마을로 이동했습니다. 주말을 맞아서인지 재기차기 등 민속놀이가 이곳 저곳에서 이루어 지고 있었고, 지역 특산물인 군밤과 풀빵을 파는 간식집 등이 있었지만, 이곳의 한옥들은 기본적으로 숙박객들을 받는 숙소였습니다. 그래서 겉에서만 둘러 볼 수 밖에 없었고 내부를 밀도있게 볼 수 있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음식점들의 음식 메뉴는 왜 이리 비싼지... 콩나물국밥 7,000원은 관광지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일반적인 한식 메뉴에 '정식'이라는 이름을 붙여 17,000원, 21,000원 하니, 먹을 엄두가 안 나더군요.  그래서인지 콩나물국밥집을 제외한 다른 음식점들은 거의 비어있는 듯 했고,(아, 근처 전통혼례 피로연장으로 쓰인 식당도 제외하고요.) 콩나물국밥과 편의점 컵라면만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습니다. 저희도 식사때가 이미 지나고 있어서, 그냥 컵라면으로 한끼를 때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줄 알았으면, 한옥마을은 그냥 패스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무령왕릉/송산리고분군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역시 한옥마을에서 송산리고분군까지 도보로 이동했는데 한 7~800미터 정도로 느껴졌습니다. 약간 피곤한 상태에서 걸으니, 차를 가지고 올껄... 하는 마음이 잠깐 생길 정도... 오후 약 1시반쯤 도착해서 처음 간 곳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웅진백제역사관이라는 곳이었는데, 백제의 여러 위인/유명인들을 캐릭터화한 점이 눈에 띄였습니다. 다만, 상영 내용이 너무 단순하여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미취학 아동들을 동반하지 않은 여행객의 경우 패스해도 무방한 정도였습니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이 우리를 맞았습니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들어간 후, 이제 더 이상 각 고분들과 무령왕릉의 실물을 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유물의 보존을 위해 문화재청에서 영구폐쇄의 결정을 내리고, 대신 모형전시관을 열어 관람객들을 맞이 하도록 했다는군요. 와이프와 '역시 집은 모델하우스로 봐야 혹 하고 본다', '복부인들도 여기 모델하우스를 좋아할까?'하는 둥의 농담을 주고 받으며 '모형전시'된 고분/왕릉을 둘러 보았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옛날 중학교 수학여행때 무령왕릉 들어가서 더 잘 보고 나올껄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네요.

   송산리고분군 출구는 입구쪽과는 별도로 나 있었는데, 나오면 바로 국립공주박물관 쪽으로 향하는 오솔길이 있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약 3~4분 간 산책하고 나니 박물관 뒤편 관사쪽으로 연결되는 후문이 있더군요. 한옥마을을 거치는 것 보다 더 아늑한 산책길로 기분 좋게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오후 2시반쯤 되었습니다.

 

   이제 차를 타고 황새바위로 이동합니다. 황새바위는 공주중학교 건너편 가톨릭 성당과 함께 위치하고 있었는데요. 천주교 대전교구의 천주교 성지 중 한 곳이라고 하네요. 조선후기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많은 분들이 순교한 장소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방문객이 많지는 않은 곳이라 사람들에 치이지 않고 경건한 마음으로 둘러 볼 수 있었습니다. 성당에서 조성해 놓은 '십자가의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니,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있고 그 중 한 나무의 주위를 따라 엄청나게 많은 십자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나무들을 조금 지나니 큰 바위 하나가 있고 다른 바위들이 여럿이 빙둘러 세워져 있었는데, 직감적으로 이것이 '황새바위'인가 싶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세워져 있는 바위 하나 하나에 박해로 숨진 당시 가톨릭 신자들의 이름과 세례명 나이 등이 새겨져 있더군요. 안타까운 것은 이름도 세례명도 없이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친 '윤 서방' '이한교의 누이' 등이 있었다는 것과 불과 10살의 어린 나이에 순교한 사람도 보였다는 것... 종교란 참 무섭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삼 순교자분들의 굳은 의지와 신념에 고개를 숙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공주의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숙소가 있는 부여로 가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점심을 컵라면으로 때운 우리는 저녁식사만큼은 부여의 맛집에서 제대로 먹어보리라 결의를 다지며 부여로 향했습니다. 물론 그만큼의 출혈은 감수를 해야 겠지요. 부여 맛집 소개와 부여 여행지 탐방은 다음 포스팅에 잇도록 하겠습니다.

Posted by truerain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