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른 바 파워블로거들이 시제품을 띡 받아서 대충 외관 위주로 보고 성의 없이 쓰는 리뷰를 아주 싫어 합니다. 제가 그런 리뷰를 보고 물건을 구매하여 느낀 단점들... '정말 몇 번 사용해 봤다면, 느끼지 못할 수가 없어 보이는 단점들을 그 리뷰들은 왜 지적하지 못한 걸까'하는 생각에 그 광고홍보성 블로그 리뷰들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저는 파워 블로거도 아니려니와 그런 식의 리뷰들을 돈 받고 쓸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물론, 저같은 영향력이 제로에 가까운 블로거(가 아닌 블로거가 되려고 발버둥치는 문외한)에게 그런 의뢰를 할 광고주도 없다는 걸 잘 압니다. 다만, 저는 제가 필요해서 충동구매로 사게 되어 제게로 온 IT 장비들에 대한 철저한 사용자 입장에서의 리뷰들을 써 나가려고 합니다.

    당연히 제가 사는 물건들에 대한 리뷰이므로, 대중적으로 인기가 좋다거나, 이슈가 되는 IT기기가 아닌 정말로 거의 사는 사람이 저밖에 없는 물건도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거기엔 실사용자인 제 구매 목적과의 일치 여부에 따라 단점에 대한 가감없는 설명을 포함할 것입니다. 혹시 실사용을 위해 제 글을 보시게 될 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직접 사서 쓰는 IT기기 리뷰]

제1편 Cenovo mini PC 2 개봉기 및 초기 사용기

    지난 10월 3일, 저는 큰 맘먹고 USD115.07짜리 중국산 미니컴퓨터를 aliexpress.com을 통해 구입하였습니다. 원화로 표시된 승인금액은 128,141원이었구요. Cenovo라는 브랜드의 'mini PC 2'라는 모델명의 제품이었는데요. 아마 첫 번째 'mini PC'에 이은 후속 모델인가 봅니다. RAM 4G, eMMC 64G CPU는 체리트레일 Z8400에 인텔그래픽을 사용하며 Windows 10을 포함한다고 제품설명에 되어 있더군요. 사실 미치지 않고서야...  검증이 안된, 그것도 갖은 사기성 제품이 범람하는 중국에서 100달러가 넘는 제품을 해외 직구매를 한다는 것이 엄청난 모험이라는 이성적인 생각을 할 틈 없이, 어느 샌가 이미 결제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는...

    결제 후 제품을 기다리는 동안, 아무래도 너무 싼 가격에 윈도우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하여, 구글링을 해 보았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국내에는 이 제품을 구매하시고 후기를 올리신 분을 검색하지 못하였구요. 해외 커뮤니티쪽을 뒤져보니... 우선 윈도우 10이 정품이 아니더라는... autoKMS라는 속임수 툴로 정품으로 인증받은 것 마냥 해 놓았다고 하더군요. 어떤 사람의 경우는 아예 activation이 풀려 있었다는 경우도 있었구요. 게다가, 부팅시 ROM BIOS 환경을 변경하기 위한 UEFI Firmware에 진입할 수 있는 화면도 나오지 않고... 데비안도 일부 블루투스, WIFI 드라이버가 잡히지 않고... 등 등 무수한 문제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품이 도착할 때까지, 도대체 얘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지만, 도착할 때까지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도착을 한 것은 지난 10월 24일이었습니다. 약 3주 걸렸으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포장 박스부터 내용물들까지 사진을 찍어 놓고, 테스트를 시작하였습니다.

박스 상단 모서리 부분이 약간 찌그러진 채 배달되었습니다. 운송중에 다른 물건의 하중에 눌렸나 봅니다. 박스 안 제품에 특별한 문제는 없었습니다.

박스 자체에 밀봉이 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제품을 감싸고 있던 비닐도 밀봉이 되어 있지 안았구요.

제품 밑의 내부 덮개 역할을 하고 있는 걸 들어내면, 사진에 나오는 전원 콘센트 연결선, HDMI선, 영문설명서, 품질보증서, QC합격증이 나옵니다. 프리볼트 제품이고 콘센트 규격을 선택이 가능했는데 당연히 한국에서 호환되는 EU방식을 요청했습니다. 다만, 실제 사용해 보니 돼지코가 꽤 헐거워 벽에 꽂아 쓰기엔 불안한 측면이 있습니다.

박스 뚜껑 옆면에는 제조사 시리얼 넘버, 선택사양인 플러그규격, RAM용량 등에 대한 표시가 있네요.

 

    일단, 부팅을 시작하니 우리가 잘 아는 윈도우즈 10의 부팅 화면이 나오고, i3급 컴퓨터들 보다 꽤 느린 속도로 부팅을 완료하더니, 초기 대화상자가 영문상태로 나타나네요.

이 단계에서 한글은 설정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초기 설정을 모두 마치고, 한글 언어팩을 추가 설치한 후 한글설정을 해 주어야 합니다. 요즘, 중국산 윈도우패드 등이 우리 나라에 많이 들어와 온라인 상에 한글팩 설치 및 설정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 있어서 걱정은 되지 않습니다.

 

    일단 저는 테스트를 위해 Microsoft 계정과 연동하지 않고 로컬 계정으로 만들어 로그인을 해 봤습니다.

 

    개인 설정을 모두 마친 후 로그인 된 모습입니다.

 

    일단, 시스템 정보를 들여다 봤습니다. 형식상으로는 샤양이 맞는 군요. 그러나 방심은 금물... 중국제품은 용량을 그럴싸하게 광고하는 대로 표시되게 해 놓지만, 실제 용량은 그보다 훨씬 못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다음으로, 과연 정품인증이 되어 있는지, 되어 있다면 크랙에 의한 것인지를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예상한 대로 당연히(?) 정품 윈도우가 아니라고 하네요. 올바른 키를 입력하든지 아니면 스토어로 이동하라고... (돈을 내라는 이야기죠.)

    아, 미치겠네요. 이놈을 우짜쓰까...

    일단 다른 하드웨어적인 문제가 있는 지 확인해 보기로 합니다.

    아... 오디오 잭을 통하지 않고, 걍 HDMI 선만 연결했더니, 윈도우 소리설정에 HDMI audio가 안 보이네요. 장치관리자에 알수 없는 장치로 나오는 것도 없던데.. '헐... TV BOX를 표방하는 제품이 HDMI audio가 안된다는게 말이 되나?' 일단 이 부분은 Aliexpress 셀러에게 문의하고 드라이버를 요청하기로 합니다.

화면 오른쪽 Sound 창의 재생장치로 유일하게 스피커가 나오고 있습니다. 오디오 잭이라는 이야기지요. 그 스피커 아래에 HD오디오장치가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HDMI 선을 통해 전송된 Audio 를 TV에서(Audio잭 없이) 들을 수 있지요.

    음... 윈도우를 이렇게 정품인증 되지 않은 채로 쓸 수는 없기에, 정품 윈도우 혹은 다른 운영체제를 깔 수 있도록 부팅 순서 조정을 위해 재부팅 후 CMOS Setup에 진입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전술한 해외사이트에 나온 이야기처럼 아무런 화면이 나오지 않다가 윈도우 부팅 로고로 바로 넘어가네요. F1, F2, Del, Esc 별의 별 키를 다 눌러 봅니다. 그래도 반응이 없어서, 윈도우 8부터 지원하는 원도우 설정으로부터 UEFI Firmware 진입을 시도해 봅니다. 아, 드디어  그런데, 여기서 황당한 하자를 발견하네요. 화면이 불규칙적으로 껌벅껌벅 하는 증상.... 아, 싼게 비지떡이구나. 내가 미쳤지 이런 허접한 물건을... 궁시렁 궁시렁...

 

    멘붕상태에서 헤어나와 하자사항을 정리하여 Aliexpress에 Dispute를 걸기로 합니다. 당초에 고지없이 윈도우즈 불법복제가 깔린 제품을 판 것에 대하여는 60불을 환불요청하려고 하였습니다만, CMOS Setup 화면에서 화면 껌벅거리는 것과 HDMI 오디오 문제를 엮어 20불 추가하여 80달러 환불요청 진행해 보겠습니다. 좋은 결과가 나와야 할텐데요. ㅠㅠ

    Dispute 결과는 나오면 따로 포스팅하기로 하고, 이 제품에 대한 초기 사용기를 최종 정리합니다. 일단 첫번째, 저는 제 뽑기 운이 없어서 화면 깜박임 현상이 있다고 생각하고요.(해외의 동일제품 사용자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클레임입니다.) 두번째, 이 제품을 구입할 때 정품 윈도우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구입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기기의 장치드라이버는, 조사해 보니, 제조사의 홈페이지에서도 구할 수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저는 이 제품을 비추하고요. 결코 싼맛에 산다고도 절대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다만, 본인이 컴퓨터에 실력이 최소 중급 이상은 되고, 정품 윈도우도 깔 수 있다면, 싼 맛에 구매해서 설치된 드라이버 백업 받고, 윈도우 정품을 설치해서 백업된 드라이버를 복구해서 쓴다면, 뽑기운이 받쳐준다는 전제하에 최강의 가성비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다만, 저의 경우 아직 실사용의 기간이 1주일 밖에 되지 않고, 부분환불 협상이 실패하면 제품 반송 및 전액환불을 해야할 가능성이 있어서, 아직 직접 정품윈도우를 설치하지 못했기에, 다음 포스팅으로 넘겨 2차 리뷰 형태로 진행해서 과연 이 제품이 운영체제 설치가 가능할지 실제 점검해 보도록 하렵니다. 아, HDMI audio 사용 가능 여부도 다음 포스팅에 포함해야 하겠습니다. [ 끝 ]

 

Posted by true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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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한창 가요와 팝송에 눈떠서 여러 음악을 접하기 시작하고, 카세트테이프나 LP 음반을 구입하면서, 어떤 음반들은 타이틀 곡 한 두곡을 듣고 접은 음반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음반들은 이상하게 전체 앨범을 반복해서 들으며 위안이 되기도 하고, 감동이 되기도 하였으며, 아니 그냥... 그냥 이유 없이 좋은, 듣기 좋은 음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음반이 함께 음악을 듣던 친구들과도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죠. 심지어는 매년 연말마다, 무슨 전문가라는 분들의 조사를 거쳤다는 대한민국 100대 명반이니 하는 발표를 볼 때마다, 천편일률적으로 언더그라운드 포크/락 계열의 음반들 위주로 가득 채워진 명반 순위표를 보면, 내가 좋아하는 음반들과 전혀 관계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나는 발라드도 좋아하고 뽕짝도 좋아하는데...

   생각의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기호가 달라 알려진 맛집도 내가 가서 먹어보면 별로이듯, 명반(名盤)이 라는 것도 내가 들어서 졸리면 그건 아닌 거다'

   그래서 기획해 봤습니다. 이름하여 '내 맘대로 명반' 시리즈... 연말 100대 명반에 들지 않아도,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명반은 아니더라도... 아니, 심지어는 전문가 혹은 음악 좀 듣는 다는 분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음반일지라도, '내가 듣기 좋고 내가 좋아하면 그게 바로 명반'이라는 생각으로 이 연속 기획 포스팅을 해 나갑니다.

 

[내 맘대로 명반(名盤)] 제 2탄

 

조용필 4집 (1982.05.17)

 

   이 앨범은 제 기억에 1990년대, 2000년대 평론가들의 호불호가 분명히 갈리었던 음반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소위 '대한민국 100대 음반' 식의 순위를 매기는 행사가 주로 연말에 많이 있었는데요. 평론가들에 따라 이 앨범이 전혀 순위에 들지 못한 경우도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의 개인 명반 순위 1위에 올려 놓기도 한 그런 음반이었습니다. 이 앨범을 제 두번째 [내 맘대로 명반]에 소개하는 것은 제가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아, 물론 이 앨범이 제 No. 1 이라는 이야기까지는 아닙니다.)

조용필 4집 앨범 재킷 전면조용필 4집 앨범 재킷 전면입니다. (원본 : maniadb.com)

   당시, 조용필의 음반을 이런 순위에 넣는다면, 1집 한 장, 더 들어가면 7집 정도까지만 꼽는 분들이 많았어요. 1집은 조용필이라는 가수를 1980년대를 규정하는 상징적인 대중음악가로 각인시키고, 1980년대의 대한민국 음악 조류의 방향을 설정하게 했다는, 대중음악사에서의 '기념비적인' 위상때문이겠지요. 그런가하면, 7집은 비로소 조용필이라는 가수가 '트로트'라는 굴레를 벗어나, 음악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록 장르를 온전히 전면에 내세운 앨범이라는 점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대 평론가들이 중시하던 요소들인 대중음악사에서의 위상, 장르적 일관성 등을 이 4집 앨범은 갖추지 못하였지요. 그런데 오히려 저는 그런 이유로 이 앨범이 명반에 오를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앨범은 동요에서부터 록, 발라드, 성인 가요(어덜트 컨템퍼러리) 뿐만 아니라, 트로트, 심지어는 민요(라이브 메들리)까지 담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봅시다. 이렇게 앨범을 구성하고 싶은 건 차치하고, 이렇게 앨범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대중가수가 있(었)는지를...

   이 앨범이 발매될 무렵의 조용필이라는 가수는 5세 꼬마들부터 7~80대 어르신들까지 대한민국의 전 세대를 아우르며 사랑을 받는 절대적인 위상을 가진 가수였습니다. 이런 가수는 그 전에도 나오기 힘들었을뿐 아니라, 음악적 취향의 분화가 심해지는 요즘 세대 이후 앞으로도 거의 절대적으로 나오기 어려운,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가수였던 것이죠. 마찬가지 이유로 이런 전 세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장르의 수록곡을 담아낼 수 있는 이런 4집과 같은 음반은 대중음악사에 전무후무할 것입니다.

   조용필은 이 앨범을 기획하면서, 이렇게 전 세대를 아우르는 곡들을 골고루 수록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조용필에 빨대 꽃고 있던) 지구레코드사의 트로트에 대한 요구는 집요했겠지요. 트로트 장르가 음반 판매량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던 시대였으니까요. 조용필은 전작 「고추잠자리」에서의 대중적인 성공으로 음반사 측의 이러한 요구를 최소화 시켜가고 있었고, 이 앨범에서는 트로트 넘버를 「보고 싶은 여인아」라는 곡 하나만 수록합니다. 이 곡은 어덜트 컨템포러리 계열의 리메이크곡 「산장의 여인」, 우리 민요를 '위대한 탄생'과 함께 접속곡으로 연주한 라이브 「민요메들리(81 해운대 비취페스티벌 실황)」과 함께 당시 어르신들의 귀를 즐겁게 해 드리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엄청난 유지비가 들어가는 당대 최고의 세션 밴드 '위대한 탄생'의 당시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민요 연주였습니다. 팔순 잔치에 내놔도 손색없는 밴드였죠.)

   반면, 파격적으로 동요를 트랙에 수록하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한정동 작시 윤극영 작곡의 「따오기」인데요. 당시는 신군부의 정책상 의무적으로 (다른 사람이 부른 곡이라도) 건전가요 1곡씩을 넣어야 했던 시절입니다. 조용필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는데요. 그는 3집의 「오빠생각」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 4집에서도 '건전가요의 참신한 역발상'을 시전합니다. 바로 이 건전가요를 직접 불러, 어린이들을 위한 트랙으로 활용한 것이지요. 역시, 파격적 수록곡인 '어린이(를 위한) 가요' 개념의 「난 아니야」와 함께 당대 어린이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따오기」가 유아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반면, 소녀 취향의 곡 「난 아니야」는 청소년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어릴 적 초등학교 같은 반 여자 아이가 교우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에, 이 「난 아니야」를 불렀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네요.

   또한, 전 계층을 타깃으로 하는 대중성을 지닌 (초기) 발라드 계열의 노래들도 갖추어 놓았는데, KBS2 TV 동명의 드라마 주제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록발라드 넘버 「꽃바람」도 수록해 놓았으며, 4집 앨범하면 「못찾겠다 꾀꼬리」와 함께 대표곡이 된 「비련」이 있었습니다. 이 「비련」은 앨범의 거의 끝[각주:1] 부분에 수록되어 있고, 4집 프로모션에서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지만, 워낙 조용필의 가창력이 돋보이고, 노래가 좋아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5집이 발매되고 난 뒤에 전국민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아, 오히려 5집의 팝락 계열의 타이틀곡 「나는 너 좋아」 프로모션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차트 역주행'을 했다고 할 수 있지요. 바로 그 '기도하는~ (꺄아아아악~)'이 제목보다 더 유명한 그 곡입니다. (「비련」에 관하여는 조용필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감동적인 일화가 있다고 하는데요. 이 글의 작성 방향과 맞지 않아 링크로 대신합니다. 꼭 한 번 읽어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왜 조용필이 단순히 한 시대를 풍미한 딴따라가 아닌 존경받아야 할 시대의 귀감이자 아티스트인지를 알려 줍니다.)

조용필 4집 L/P 앨범 재킷 뒷면조용필 4집 L/P 앨범 재킷 뒷면입니다. (원본 소스 : maniadb.com)

   이렇듯 조용필 4집의 '버라이어티'는 앨범의 흠결이 아닌, 조용필만이 가능한 능력의 발휘였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이 음반의 개별 수록곡들이 가지는 음악적 성취와 사회적 메세지입니다.

   조용필은 이 앨범에 그의 밴드 '위대한 탄생'과 함께 「자존심」이라는 록 넘버를 수록하는데, 이 곡은 서양에서 넘어온 록이라는 장르가 조용필이라는 한국의 로커를 만나 (단순한 서양 록의 흉내가 아니라) 어떻게 '한국의 록'으로 거듭나는가를 들려 줍니다. 음악의 기초 골격이라고 할 수 있는 드럼의 비트부터가 다릅니다. 아니, 차라리 「자존심」의 드럼은 '비트'를 치지 않고 아예 '(굿거리)장단'을 두들기고 있습니다. 마치 꽹가리로 드럼의 하이햇을 대신 연주하고 있나 착각하게 되죠. 여기에 국악에서 차용한 한국적 락 멜로디를 접목하여 서양의 록 사조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사운드를 들려 줍니다. 조용필의 탁성은 1집에서 「대전브루스」를 재취입할 때 썼던 탁성(저는 사실 이 곡의 탁성을 일본 엔까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과는 다른 '판소리적' 매력을 발산합니다. 한 곡 안에서 탁성, 가성, 본성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의 보컬은 쉽사리 흉내내기 어려운 경지에 도달해 있음을 알려주지요. 그리고, 엄청난 대중적 사랑을 받은 타이틀 곡 「못찾겠다 꾀꼬리」는 경쾌한 팝락 계열의 음악임에도, 그 장르가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한국적 정서가 뿜어져 나오는 곡입니다. 역시 우리 '장단'에 베이스 리듬을 두고 있기 때문이죠. 어른들의 '동심'에 대한 추억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가삿말이 조용필의 진성, 두성, 가성과 어우러져 어린이, 젊은이들뿐 아니라, 장년층에 까지 고른 사랑을 받았던 곡입니다.  이 두 곡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한국적 록' 음악이 완성단계에 와 있음을 알려 주는 곡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4집 앨범의 가치를 이야기하며, '사회적 메세지'를 들었을 때, 혹자는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황당해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당연합니다. 사실 그 담고자 했던 사회적 메세지는 당시 서슬퍼런 신군부의 5공화국 치하 공연윤리위원회의 숱한 '가위질'로 인해 훼손되고 도저히 원 뜻을 알 수 없는 상징과 은유로만 채워졌다고 하니까요. 이제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바로 「생명」이라는 곡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앨범이 준비되던 1982년 초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은지 채 2년이 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TV와 신문에서는 '북괴 간첩과 용공분자들이 사주한 광주폭동'을 우리 군 공수부대 등이 '진압'에 성공한 것으로 보도하던 시절, 그 진상(眞狀)은 당국의 눈을 피해 비공식적인 유인물, 영상 등으로 몰래 전해지던 시절이었다고 하죠. 당시 조용필은 '광주학살'의 실상(實狀)을 전해 듣고 그 분노를 노래로 표출하고자 합니다. 그는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부르던 전옥숙 여사와 함께 (김지하씨의 글로 알려진) '생명'을 가사로 다듬어 곡을 만들고 취입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공연윤리위원회의 반복되는 심의 반려로 인해 전옥숙여사가 가사를 대폭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김원중의 「바위섬」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는 아무도 그 참뜻을 알 수 없었을 것은 당연했습니다. 알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은 (작사/작곡자를 제외하고) 아마 김지하씨 밖에 없었겠지요. 김지하씨가 옥중에서 이 노래를 듣고, '조용필이란 놈이 어떤 놈인지 궁금해 했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합니다.[각주:2]

   이제 정리를 위해 요약하자면, 조용필 4집이 가지는 의의는 각 수록곡이 가지는 음악적, 사회적 가치들과 함께 조용필만이 할 수 있는 전 세대를 아우르기 위한 전 장르에 대한 커버리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 장르적 다양성으로 인해 희생될 수 밖에 없는 가치가 바로 특정 장르에 대한 일관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단적으로 말해, 전 세대를 만족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세대도 만족할 수 없는 최악의 '짬뽕' 앨범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조용필도 아마 그러한 고민들을 했을 것이고, 그 고민의 결과물이 바로 록과 발라드 음악을 위주로한 젊은 층을 위한 앨범인 7집과, 어르신들을 위한 트로트와 어덜트 컨템포러리를 메인으로 하는 8집이라는 명반들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 함께 기획되어, 약 반 년 정도의 기간을 두고 연달아 발표된 이 두 앨범에서 본인이 작곡에 집중한 「어제, 오늘 그리고...」, 「미지의 세계」 「여행을 떠나요」로 젊은이들의 열광을 얻고, 명망있는 작사/작곡가들에게 작품을 부탁한 「허공」,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으로 중 장년층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 두 앨범들도 언젠가 제 포스팅에 소개가 될 날이 오겠지요. [내 맘대로 명반]이니까요.

 

트랙 정보

(CD 수록 순서에 따름)

1982년  5월   17일 발매 정규앨범
LP 지구레코드 JLS 120-1706
CD 지구레코드 JCDS 0092

녹음기사 이태경
Guitar 곽경욱 / Drums 이건태 
Moog & Piano 김청산 / Bass Guitar 김택환 

 

1. 못 찾겠다 꾀꼬리

작사 : 김순곤, 작곡 : 조용필

 

2. 생 명

작사 : 전옥숙, 작곡 : 조용필

 

3. 꽃바람

작사 : 양근승, 작곡 : 조용필

 

4. 따오기

작사 : 한정동, 작곡 : 윤극영

 

5. 난 아니야

작사 : 김순곤, 작곡 : 조용필

 

6. 보고 싶은 여인아

작사 : 임석호, 작곡 : 임석호

 

7. 자존심

작사 : 조종순, 작곡 : 조용필

 

8. 산장의 여인

작사 : 반야월, 작곡 : 이재호

 

9. 비 련

작사 : 조용필, 작곡 : 조용필

 

10. 민요 메들리

새타령 / 남원산성 / 성주풀이 / 진도아리랑

 (1981 해운대 비취페스티벌 실황) 

 

(원본 소스 : choyongpil.net)


  1. 조용필 4집 앨범 트랙의 배열 순서는 당초에 나온 L/P, 카세트테이프와 나중에 나온 CD가 차이를 보입니다. L/P, 카세트 테이프에서는 「비련」이 「자존심」뒤의 B면 세 번째 곡임에 반해, CD에서는 「산장의 여인」의 뒤에 나오는 아홉번째 트랙입니다. [본문으로]
  2. 강준만 著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4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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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며칠 새, 한 방송사를 통해 너무나 엄청난 일들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나왔습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 개헌추진 선언을 하던 바로 그 날 저녁, JTBC 뉴스룸을 통해 최순실씨가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태블릿 PC가 이 방송사 기자에게 입수 되어, 그 파일의 내용 중 일부가 언론 보도를 통해 나온 것이지요. 그동안 '국가서열 1위 최순실' 등 '설'로만 존재하던 사실들이 이른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그렇게 대한민국을 강타했습니다. 온라인 실검 최 상위권에 하야, 탄핵 등의 단어들이 올라가는 등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해외 언론에 자세히 보도되고 있는  이 사태에 우리 국민들은 '부끄러워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다'고 하소연합니다. 대한민국의 민주공화정 시스템과 국민의 자부심은 사실상 심각한 붕괴상태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의 '民'자는 우리 나라가 민주공화국임을 나타내 준다는데, 우리에겐 과연 대한민국의 '민'자를 국호에 달 자격이 있는 걸까요? 대한민국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지금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제 [세상을 보는 눈]으로 살펴 봅니다.


1. 오늘의 대한''국 ... 어디로 가고 있나요?


    일단, JTBC의 보도로 가장 큰 이슈가 된 것이 '대통령의 연설문' 사전 유출과 최순실의 '첨삭 수정'입니다. JTBC 기자에 의해 대통령의 연설문이 발표되기 전 최순실씨에게 전달되어, 최씨의 첨삭과정을 거쳐 대통령이 발표하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통령 취임 전후부터 2014년 무렵까지의 파일자료가 공개된 겁니다. 이 파장이 커지자, 대통령이 신속한 '사과'를 했지요. 하지만 '더 잘하기 위해 본인이 어려울 때 함께 해준 친분있는 지인에게' (연설문에 관한) 도움을 구했다'는 식의 1분 30초짜리 변명에 가까왔다는 게 세간의 평입니다. 이 정도 사과에서 사태가 마무리되었으면 하실 박대통령의 바람과 달리, 각 언론사마다 전직 공무원, 미르/K재단 전 임직원 등 최순실로 인해 쫒겨나거나 스스로 퇴직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줄줄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어, 언제 어디서 더 충격적인 보도가 나올지 걱정스러운 정도가 되었습니다.

박대통령 사과 발표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연설문 유출과 관련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시작하기 전 인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67441.html#csidxf225f0fae20d9448a6735347df8d1e4

   이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으로 추정되는 후속보도는 한겨레에서 접촉하고 있는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의 인터뷰입니다. 지금까지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아직 사실로 드러나지 않은 내용이 90%정도 된다고 하며,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실들에 대한 근거자료를 녹취록, 각종 문서, 녹음 파일의 형태로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JTBC도 이미 그 태블릿 PC에 연설문만이 아닌 민감한 외교문서, 국방관련 문서 등이 발견되었다는 보도를 했고,정밀 분석을 거친 후 추가적인 보도를 하겠다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특정인의 주장에 불과한 '설'들이 사실로 밝혀지고 있는 지금, 아직 '설'들로 남아 있는 그 내용들에 근거가 뒷바침될 때, 그땐 어찌될까요? 어쩌면, 어제 대통령이 한 어정쩡한 '사과'는 본인에게 더 큰 독으로 돌아올지 모르겠습니다.

    이 와중에 최순실씨는 독일에서 세계일보 기자와 단독 인터뷰를 열어, 박대통령의 '사과'에서 인정한 수준의 내용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모른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는데요. 이 분들의 기대와 달리, 언론에서 입수하였으나 그동안 차마 기사화 시키지 못한 이야기들이 민간에서 횡행하고 있는 상황이고 일부 야당 정치인들에 의해 인용되어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 시작하고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최순실이 단독으로 대통령의 일에 개입한 부분도 있겠지만, 무속신앙에 바탕을 둔 '팔선녀'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어서 이들의 의견을 취합한 형태로 나라의 인사, 외교, 국방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을 박대통령에게 전달(차마 지시라고까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아직까지는요...) 해 왔다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었던 이야기들이 언론을 통해 봇물 터지듯이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최순실씨 인터뷰오늘(27일)자 아침 세계일보에 실린 최순실씨 인터뷰 기사

    우리 국민들이 자괴감을 갖고 도무지 얼굴을 들 수 가 없다는 부분이 여기 있습니다. 단순히 사적 채널이 국정을 좌지우지한 것도 모자라 그 사적 채널이 샤머니즘에 기반을 둔 이단에 가까운 종교적 조직이라니요? '우리 나라가 1970년대 개발독재 시대로 돌아간 줄 알고 있었더니 청동기 부족국가 신정(神政)정치 시대로 가 있었다'는 어느 인터넷 댓글의 내용은 우리 국민들의 정신적 충격과 자괴감의 깊이를 가늠케 해 줍니다. 인기 드라마 '주몽'에서 보던 이야기를 21세기 뉴스에서 보고 있게 될 줄을 상상이나 해 보셨나요?

    무엇보다 저는 북쪽에서 우리를 비방하는 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솔직히, 독재시대로의 회귀를 꿈꾸는 사람들이 도사리고 있긴 해도, 국민들이 피와 땀으로 건설하고 지켜낸 경제대국과 이 민주공화정은 3대 세습체제에 짓눌려 있는 북쪽에 비하면 우리의 자랑 아닌가요? 그러나 이제는 저 쪽에서 '무당의 지배를 받고 있는 놈들'이라고 우리를 비난했을 때 반박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 너무 분통하네요. 국정원이 제공한 안가에 머물고 있을 태영호 전 북한 영국 공사관은 현재 한국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는 '신정(神政) 정치' 기사까지 제공받고 있을까요? 넘어온 결정적 사유가 뭘 진 몰라도 3대 세습체제에 대한 환멸도 있긴 있었을 텐데, 목숨을 걸고 넘어 온 곳에서 무당이 섭정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2. 오늘의 대한''국은 어떻게 만들어져 왔던 것인가요?   

    이렇게 오늘 우리가 붕괴된 모습을 보고 있는 대한민국 민주공화정치 체제는 우리 조상들이 일제로부터 저항하며 만들어 내고 (비록 연합군의 승리로 주권을 회복하였지만), 우리 선배들이 피땀으로 지켜낸 것입니다.

    1919년 3월 1일 삼일 만세운동은 국내에서 온 민족의 자주독립 열망을 확인한 사건이었습니다. 민족지도자들은 이를 계기로 해외에 독립운동을 위한 거점을 마련하고 이 조직을 망명정부형태의 준정부 구조로 가져갑니다. 바로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는데요. 경술국치(1910년)로 소멸한 대한제국의 왕족은 일본 귀족화 되어 더이상 조선 민족 독립의 열망을 담아낼 수 없었고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임시정부를 세우고자 했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이 망명정부의 형태를 왕정복고가 아닌 민주공화정으로 하기로 한 것이지요. 그런 연유로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은 당시 중화민국 군의 협조하에 자체 군 조직을 창설하여 해외에서 연합군의 대일 전투에 참전하였고, 한반도 진공작전을 준비하는 등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본을 무찌르고자 많은 준비를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첫돌 1월 1일, 임시정부 요인 58명이 상하이에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둘째줄 왼쪽에서 7번째가 이승만, 첫째줄 왼쪽에서 3번째가 김구, 이승만 오른쪽으로 4번째가 안창호. (출처: 나무위키) 원본소스 : https://namu.wiki/w/%EB%8C%80%ED%95%9C%EB%AF%BC%EA%B5%AD%20%EC%9E%84%EC%8B%9C%EC%A0%95%EB%B6%80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 예하 광복군이 한반도 진격의 꿈을 이루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고 연합군이 승리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라고 하지요. 이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는 승전국의 지위도 얻지 못하고, 한반도를 실효지배하는 정부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래도 3년간의 미군정 끝에 1948년 8월 15일, 비록 남한만의 단독 정부이지만, 한반도 내에 우리의 실효 지배 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근거가 되는 제헌헌법은 1948년 7월 17일 제정 반포되는데,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함을 명문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룩한 대한민국의 민주공화정의 역사는 쉽게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부는 무리한 장기집권을 위해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과 정부통령 선거의 부정(이른바 3,15부정선거)을 저지르게 됩니다. 민주공화정이 붕괴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이를 지키려고 시민, 학생들은 죽음을 불사한 저항을 했고, 침묵하던 시민들의 대규모 가세로 인해, 이를 총칼로 막던 자유당 정권의 장기집권 기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기붕 부통령은 자살,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게 되죠. 이를 우리는 4.19 혁명(1960년)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이로부터 약 1년 뒤, 현 박근혜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소장이 군부를 이끌고 쿠데타(5.16쿠데타)를 감행하여, 국민에 의해 선출된 민주당 정권을 붕괴시키고, 군정 실시 후 스스로 대통령에 오르게 됩니다. 그도 장기집권을 기도하여 1972년 스스로 군대를 서울 시내에 끌고 들어와 친위 쿠데타(10월 유신)를 일으키고 이른바 '유신 헌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스스로 종신 대통령이 됩니다. 역시 국민들은 저항하지만, 유신정권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각종 긴급조치와 계엄령을 발동하여 이를 틀어 막습니다. 이번에는 4,19혁명처럼 국민이 승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부하인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10.26사태, 1979년)하는 돌발 상황에 의해 유신체제가 종말을 맞게 됩니다.

    국민에 의해 민주정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한계는 신군부라고하는 또 다른 군부세력이 상황을 장악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2,12 사태(1979년)라고 불리우는 하극상을 일으켜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등을 체포하고 실권자에 오릅니다.  민주정치 체제의 회복을 기대했던 국민들은 신군부의 등장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의 경우, 신군부의 총칼 앞에 이른바 '서울역 회군(시위대의 자진해산을 의미합니다.)'을 계기로 사실상 와해되었고, 다른 대부분의 지역 사정도 비슷했습니다. 다만, 전라남도 광주 (오늘날 광주광역시) 지역만은 민주정치의 회복을 갈망하는 시민들이 무장하여, 이를 진압하던 계엄군과 지역 경찰을 몰아내고 시내를 장악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신군부는 이를 폭도로 규정하고, 특수부대 등을 투입해, 무력 진압(1980년 5월 27일)으로 끝을 맺게 되었지요. 민주정치 체제 회복을 위해 무장 투쟁을 벌였던 이 사건을 오늘날 우리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한 어머니가 6년 전 광주항쟁에서 살해당한 아들의 묘 앞에서 오열하고 있는 사진입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광주학살'과 정적에 대한 내란음모 누명, 가택연금 등으로 권력기반을 다진 신군부의 전두환 장군은 7년 단임 대의원 간선제를 골자로하는 개헌을 단행하여 대의원들을 체육관에 모아 놓고 스스로 대통령에 오르게 됩니다. 유신시대에 버금가는 폭압적 정권에 민주정을 갈망하는 시민사회는 잠시 숨을 죽였지만, 7년 임기가 끝나갈 무렵 '직선제 개헌'을 모토로 하는 민주정 회복 요구가 점점 거세지게 됩니다. 당시 연세대 학생 이한열씨가 민주회복을 위한 시위를 벌이다가 진압 경찰이 쏜 직사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약 한달 뒤 죽음에 이르게 된) 사건을 계기로 전국민적인 민주화요구가 빗발치게 됩니다.(6월 항쟁, 1987년) 신군부 세력은 다시 한번 강경진압을 검토하지만, 1년 뒤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계엄과 군투입은 쉽지 않은 선택지였습니다. 결국,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체육관 대통령'이 될 예정이던 노태우 여당 대통령 후보가 '직선제 개헌'을 전격 수용하는 형태로 사실상의 후퇴를 하게 됩니다.(6.29선언, 1987년) 이때 여야 합의와 국민투표로 5년 단임 및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골자로 해서 만들어진 헌법이 현재의 우리 헌법입니다. 87년 발효되어 대통령이 여섯 분 탄생했지요. (그래서 우리의 현행 정치체제를 '87년 체제'라고도 부릅니다.)

1987년 6월 9일 당시 연세대 학생이던 이한열씨가 호헌철폐 및 직선제 개헌을 위한 시위 도중 머리에 직사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정부를 수립한 이후로 민주공화정에 위기가 닥칠때 마다 날아오는 총탄에도 몸을 아끼지 않은 우리의 선배들의 선구자적 행동으로 버텨왔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결정적인 순간에는 묵묵히 현업에 종사하던 보수적인 서민 대중들이 민주정치 회복을 요구하는 대열에 합류하면서 민주공화정이 지켜져 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학생 등 선구적인 분들이 불을 지핀 후, 침묵하던 다수의 대중들이 '이건 도저히 아니다.'라고 생각할 때 다수 국민의 힘에 의해 민주정이 회복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4,19혁명'과 '6월 항쟁'이 그 승리의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3. 우리는 앞으로 대한''국의 '民'자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전술한 바와 같이, 또 우리가 다 같이 보도를 접하고 패닉에 빠진 바와 같이, 우리는 지난 세대가 맞이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민주공화정에 대한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을 좀 달리 해 봅시다. '민주공화정'에 대한 환상부터 버려야 합니다. 민주공화정은 절대 완벽한 정치체제가 아닙니다. 중우정치라는 말이 있지요? 고대 그리이스 직접민주정 시대의 이야기인데, 대의민주정 시대인 오늘날의 의미로는 '우매한' 국민이 우매한 지도자를 택한다는 이야기쯤 될까요? 지금 개헌 논의가 있는데, 어떤 정부형태, 권력형태를 갖춰도 아래와 같은 지도자와 그 추종자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한 7푼 정도의...)좀 모자라는 정치 지도자라도 이미지관리를 통해서 얼마든 최고 권력자로 나올 수 있죠. 또 우매한(?) 국민이 그 모자라는 지도자를 열렬히 지지하고, 그것을 보면서도 (그 지도자가 좀 모자란지 알면서도) 지지가 있고 잇권이 있기에 그 주변에 똥파리들도 꼬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항상 최선의, 최상의 지도자를 뽑는 것을 보장하는 제도가 아니다. 최악의 지도자가 최악의 선택을 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체제이다.' 그렇습니다. 선거에 의한 국민의 선택이 실패할 수 있는 것이 민주공화정입니다. 우리가 자괴감을 갖지 않아도 되는 이유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선출된 지도자가 최악의 선택을 했다는 것이 밝혀졌을때, 민주공화정의 구성원인 우리는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민주정을 회복했을때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 자랑스러워 할 수 있습니다. 저들의 저항에 밀려 이 시기를 놓치게 된다면, 우리는 무당에 의한 지배를 용인한 국민으로 전락합니다. 그때는 정말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독일국민이 히틀러에게 선거로 권력을 주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권력이 나찌즘이라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이를 통제하지 못한 것도 잘 알고 있지요. 오늘날 독일은 이 시대에 대한 반성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으며, 통렬히 부끄러워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뻔뻔한 어떤 섬나라도 있지만요.)

최근까지도 나치 독일의 만행을 뼈저리게 반복해서 반성하는 독일 메르켈 총리 (출처 : 연합뉴스TV)

    그런 의미에서 (일본과 이승만을 추앙하는 뉴또라이 뉴라이트 같은 분들 말고) 이 땅에 제대로 된 보수가 있다면, 이 사태에 밤잠이 안 와야 합니다. 제대로된 보수라면 소위 진보들이 나서기 전에, 민주공화정이 무너지는 현 상황에 가장 먼저 분개하고, 가장 먼저 엄격한 법치의 잣대를 들이대고, 정치적 책임을 묻고, 신속히 대안 권력을 논의하고 추대하여 권력의 공백이 없도록 안정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대로된 보수가 지켜야할 가치입니다.

    이 나라의 국민들과 정치인들이 대한민국의 '民'자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저는 지켜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 평범한 국민들은 때로는 박근혜대통령 같은 분을 선거에서 뽑기는 해도, '민주공화정을 스스로 지켜내고 누리고 있는 국민이다'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 국민의 뜻을 대리하는 위정자들은 추상같은 법집행을 통해 국정을 농단한 자들에 상응하는 벌을 주고, 국민이 부여한 통치권을 사사로이 연을 맺은 한 자연인에게 집중적으로 넘겨 준 현직 대통령은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인 책임을 반드시 지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 민주정회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여론주도층 핵심보수와 침묵하는 다수의 보수... 이 분들이 민주공화정 회복을 위한 적극적 행동에 나선다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제 박근혜 대통령은 하야하지 않더라도, 탄핵 여부를 떠나, 레임덕을 넘어 '식물 대통령' 수준까지 갈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인물을 내세워 국정 공백이 없도로 해야 합니다. 이런 역할을 해 줄 여론 주도층 핵심 보수들의 역할이 간절히 필요한 시점입니다. 박대통령을 설득하여 진행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여당은 그럴 실력도 안되고, 그럴 생각도 없지요. 야당이 이야기하면 박대통령은 안듣습니다.

    또, 진정한 보수라면 박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포함하여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막아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내부에서 민주공화정을 붕괴시키는 세력을 추상같은 법집행으로 다스리자는 정치인과 그 세력에 힘을 실어 주셔야 외부에서 우리 민주공화정을 얕잡아 보지 못합니다. 또 그래야 우리 국민의 자존심을 세우고 대북 정치체제에 대한 우월성을 유지시켜 줄 수 있습니다.

    박대통령도 철저한 수사가 이루어져 사실관계가 명명백백히 드러나도록 하고 드러나는 위법행위에 대한 (하야 혹은 탄핵을 포함한) 정치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고 퇴임 후 형사적 처벌을 받도록 보수 여론 주도층에서 나서 주어야 합니다. 물론 수사는 빨리 진행하되 책임은 국정공백을 메우기 위한 대안이 선행된 뒤에라야 하겠지요. 이래야 진정한 보수입니다.

    대한민국 참보수들의 결정적 의견 수렴과 행동을 기대하며, 그 분들이 무너진 우리 민주공화정의 역사를 다시 세워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4.19혁명과 '6월 항쟁' 때처럼 말이죠. 자, 이제 자괴감과 수치심은 잠시 접어 두고, 모든 국민이 힘을 모아 민주공화정을 회복해 냅시다. 그리고 만약 실패한다면, 그때 부끄러워 합시다.

 

P.S. 이 글의 구성 방향과 동떨어진 이야기라 따로 기재합니다. 우병우 민정수석에 대한 특종을 연일 보도하던, 조선일보는 얼마 후, 급소를 반격당합니다. 국정원의 막강한 정보력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 주필의 비위가 어느 여당 국회의원의 입에서 폭로되면서 그 주필이 펜을 놓았지요. JTBC에 대한 반격이 예상되는 시점입니다.

Posted by true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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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말, 그러니까 10월 22일과 23일, 1박2일에 걸쳐 저희 부부 결혼기념일을 기념하는 국내 가족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 글은 지난 제1편 공주여행편에 이은 두번째 글로써 부여지역 여행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공주 황새바위 천주교 성지를 둘러본 후 저희는 부여로 넘어와서 하루를 묵을 숙소로 향했습니다. '부여관광호텔'에 미리 예약을 해 놓아서 바로 체크인만 하면 되었죠. 부여 읍내 시가지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 조용하고 풀내음을 맡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읍내 시가지하고 불과 차로 3분 정도 이내에 위치한 괜찮은 곳이었습니다. 와이프가 온돌방을 예약했는데 생각보다 널찍하니 세 식구가 자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네요.

 

   오후 4시쯤 도착해 짐을 대충 풀고, 약간의 꿀잠을 자고 일어나, 맛집으로 점찍어 둔 '사비마루'라는 곳을 찾아 갔습니다. 이 곳은 부여 읍내 한 복판에 있었는데, 다음 날 보니, 부소산성 관광지 주차장 바로 건너편에 있는 곳이더군요. 다른 분들의 블로그를 보고 찾아 갔는데, 부여 읍내의 많은 맛집들이 이곳 부소산성 입구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곳 '사비마루'의 추천 메뉴는 바로 일본에서 '규가츠'라고 불리는 소고기 즉석 구이와 꼬치요리, 그리고 초밥입니다. 저희는 위의 모든 것을 맛볼 수 있는 모듬세트를 먹어 봤는데요. 가격은 32,000원에 다양한 꼬치요리와 소고기 300g, 초밥 8개 정도의 한 접시 등을 된장찌게 등의 반찬과 더불어 먹을 수 있는 메뉴였습니다.

   일본식이라 그런지 저희 가족이 먹기에는 다소 양이 적은 듯 한 것이 단점이랄까... 맛은 괜찮았습니다. 초밥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생선 초밥, 유부 초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초밥에 썬 양파가 올려져 있고 한 켠에 와사비가 덜어져 있어서 기호에 따라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고기를 구워서 초밥과 함께 먹는 용도인 것 같습니다. 주차는 건물 옆으로 진입하여 뒤편으로 돌아 들어가면 이중주차로 6대 이상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 있어서 편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간단히 맥주를 마신 후 기절하듯 잠들면서 여행 첫날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이튿날, 9시 반도 넘어 다소 늦게 숙소를 나온 저희 일행은 점찍어 둔 부여 맛집 두 번째 집으로 아점을 먹으러 향했습니다. 저희 숙소보다도 더 외곽쪽에 롯데 리조트 근처에 '백제해장국'이 그 곳이었는데요.

 

   다소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빈 테이블이 거의 없다시피할 정도로 손님이 북적였습니다. 아마 더 일찍 갔다면 밖에서 줄 서서 기다리다 먹었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백제해장국'집에 가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백제해장국을 주문해 먹으라는 어떤 블로거님의 조언에 따라 백제해장국을 먹어 봤습니다. 일종의 모듬해장국이더군요. 양, 내장, 선지 등이 골고루 들어간 진한 국물의 해장국이었습니다. 국밥에 중요한 김치도 괜찮았고 반찬으로 주는 날 양파, 고추 등의 야채도 신선했습니다. 

   가격도  8천원으로 수도권에 비하면 비싸지 않은 정도였네요. 그 가격도 지난 10월 1일부터 1천원씩 올린 가격이었다니... 아쉬운 점은 내장의 양이 다소 적은 것이었는데, 가격을 조금 더 인상하더라도, 건더기를 조금 더 푸짐하게 하시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부여지역에서 돌아볼 곳들은 시간관계상 부소산성, 서동공원 궁남지, 정림사지 5층석탑 정도만 보기로 하였습니다. 아점도 든든히 먹었겠다. 소화도 시킬 겸 부소산성 트래킹을 첫 코스로 잡았습니다.

   부소산성은 전날 둘러본 공주 공산성과 달리, 성벽은 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코스도 성벽을 따라 순환하는 공산성과는 달리, 보통 등산이나 트래킹 하는 듯한 산길의 느낌이었습니다. 곳곳에 빈대떡과 막걸리를 파는 가게도 있고.. 수도권의 여느 산 입구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더군요. 그래도 산성 내부는 순환 산책로의 형태로 되어 있어서, 산성 정문, 낙화암, 고란사, 태자골숲길, 영일루, 삼충사를 거쳐 다시 부소산성 정문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해 걸었습니다. 

   낙화암에서 고란사/선착장으로 향하는 길은 가파르고 유난히 단체관광객들이 많아, 다소 산만하고 쾌적도가 떨어졌지만, 다른 코스들은 특별히 가파는 길이 없고 한적하여, 여유로운 마음으로 산책을 즐길 수 있었으며, 특히 태자골숲길의 경우 바닥에 돌을 깔지 않아, 흙을 밟으며 가을 산길을 산책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소산성을 나와 향한 곳은 서동공원 내에 있는 궁남지 정원이였습니다. 서동공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궁남지 쪽으로 향하니, 작은 연못이 옹기종기 있고 그 연못들 안에 연꽃들이 피어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바로 궁남지를 크게 에워싸는 형태로 엄청난 규모의 연지(蓮池)를 조성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지난 여름에 왔다면 연꽃들이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을 텐데, 이 가을에 보니 좀 흉물스럽더군요. 하지만 군데군데 작고 예쁜 수련 꽃들이 피어 있어 포룡정으로 향하는 길에 즐거움을 더해 주었습니다.

   궁남지는 다음 주에 열린다는 꽃 축제 관계로 다소 산만한 모습이었는데요. 나들이 나온 군민들과 관관객들에게는 더 많은 포토존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정림사지5층석탑이 있는 정림사지였는데요. 정림사지박물관 근처에 주차를 하고 걸어 내려가니, 5층석탑을 보려면 입장료 개인 1,500원, 어린이 700원의 요금을 내야 한다네요. 박물관을 볼 것도 아니고, 잔디나 깔려있는 정림사 터를 볼 일도 도욱 없는데, 5층석탑 잠깐 보자고 입장료를 낼 이유가 없어서 그냥 멀리 담장 밖에서 보고 가기로 하였습니다. 이때 아이폰 카메라의 줌 기능을 좀 망원경처럼 써 보니 요긴하더군요.

   이렇게 1박2일의 공주, 부여 여행을 마쳤습니다. 다행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르기 전까지는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아,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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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말, 그러니까 10월 22일과 23일, 1박2일에 걸쳐 저희 부부 결혼기념일을 기념하는 국내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물론 아들도 포함해서요. 토요일 새벽 5시 반쯤 출발하여 일요일 저녁 무렵에 집에 도착했으니, 비교적 알차게 다녀왔는데요. 올라오는 길이 꽤 밀리고 비가 주적주적 와서 조금 힘들기도 했습니다.

   토요일 아침식사를 안성휴게소에서 국밥으로 때우고 서둘러 도착한 곳은 공주 공산성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각 지자체들이 트래킹 코스를 개발하여 '무슨무슨 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쟁이 있었는데, 이곳 공산성 주변도 '고마나루명승길'이라는 이름으로 트래킹코스 안내가 있더군요.  고마(곰)나루는 공주의 옛 이름 '웅진(熊津)의 순한글 이름입니다.

 

   저희는 그냥 공산성 둘레를 한 바퀴 돌고, 차로 국립공주박물관까지 이동하여, 그 주변에 있는 한옥마을, 무령왕릉/송산리고분군 등을 둘러 본 후 황새바위를 보는 것으로 하루짜리 공주 일정을 잡았습니다.

   공산성은 성곽의 보존과 유지관리가 비교적 잘 되어 있는 산성이었습니다. 성곽을 따라 주욱 한 바퀴를 돌면, 여유있게 주변을 보며 걸어도 한 시간 반 정도면 되는 코스였습니다. 동서남북 방위에 따라 성을 지켜주는 4신(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깃발과 성문, 망루 등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고, 금강을 접하는 곳에는 시원하고 탁 트인 강주변과 공주시내의 전경이 들어와 볼 거리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여행지에서의 트래킹을 좋아하는 제 성향에 맞는 곳이었습니다.

   공산성 트래킹을 마치고 나니, 몸에 약간의 땀이 나 있고 노곤함이 느껴져서 근처 '커피향기'라는 찻집에서 잠시 쉬며 망고 대패 빙수 하나와 카푸치노 커피 한 잔을 주문하여 먹었습니다. 가벼운 운동 뒤여서 그런지 너무 맛있더군요.

커피향기 카푸치노와 망고 대패 빙수공산성 트래킹을 즐기고 오신 분들께 이곳 대패 빙수를 추천합니다. 가격은 1만원으로 기억되네요. 망고 맛 외에 블루베리 맛도 있었을 겁니다.

 

   달콤한 휴식 후 일정을 재개했습니다. 국립 공주박물관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반 정도 되더군요. 백제 시대의 유물들, 주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유물들의 진품 혹은 모조품들이 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옥내외 전시물들을 모두 꼼꼼히 둘러 보는데 약 1시간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서울의 국립 중앙박물관이나 타이베이의 고궁박물관 등에 비하면 정말 아담하고 조촐한 박물관이네요.

국립공주박물관 공산성 미니어처국립 공주박물관 구내에 전시된 공산성 축소 모형입니다. 공산성 트래킹을 먼저 다녀와서 그런지, 미니어처 위의 장소 한 곳, 한 곳이 다 익숙하네요.

 

   이제 차를 국립 공주박물관에 두고 바로 옆 한옥마을로 이동했습니다. 주말을 맞아서인지 재기차기 등 민속놀이가 이곳 저곳에서 이루어 지고 있었고, 지역 특산물인 군밤과 풀빵을 파는 간식집 등이 있었지만, 이곳의 한옥들은 기본적으로 숙박객들을 받는 숙소였습니다. 그래서 겉에서만 둘러 볼 수 밖에 없었고 내부를 밀도있게 볼 수 있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음식점들의 음식 메뉴는 왜 이리 비싼지... 콩나물국밥 7,000원은 관광지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일반적인 한식 메뉴에 '정식'이라는 이름을 붙여 17,000원, 21,000원 하니, 먹을 엄두가 안 나더군요.  그래서인지 콩나물국밥집을 제외한 다른 음식점들은 거의 비어있는 듯 했고,(아, 근처 전통혼례 피로연장으로 쓰인 식당도 제외하고요.) 콩나물국밥과 편의점 컵라면만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습니다. 저희도 식사때가 이미 지나고 있어서, 그냥 컵라면으로 한끼를 때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줄 알았으면, 한옥마을은 그냥 패스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무령왕릉/송산리고분군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역시 한옥마을에서 송산리고분군까지 도보로 이동했는데 한 7~800미터 정도로 느껴졌습니다. 약간 피곤한 상태에서 걸으니, 차를 가지고 올껄... 하는 마음이 잠깐 생길 정도... 오후 약 1시반쯤 도착해서 처음 간 곳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웅진백제역사관이라는 곳이었는데, 백제의 여러 위인/유명인들을 캐릭터화한 점이 눈에 띄였습니다. 다만, 상영 내용이 너무 단순하여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미취학 아동들을 동반하지 않은 여행객의 경우 패스해도 무방한 정도였습니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이 우리를 맞았습니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들어간 후, 이제 더 이상 각 고분들과 무령왕릉의 실물을 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유물의 보존을 위해 문화재청에서 영구폐쇄의 결정을 내리고, 대신 모형전시관을 열어 관람객들을 맞이 하도록 했다는군요. 와이프와 '역시 집은 모델하우스로 봐야 혹 하고 본다', '복부인들도 여기 모델하우스를 좋아할까?'하는 둥의 농담을 주고 받으며 '모형전시'된 고분/왕릉을 둘러 보았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옛날 중학교 수학여행때 무령왕릉 들어가서 더 잘 보고 나올껄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네요.

   송산리고분군 출구는 입구쪽과는 별도로 나 있었는데, 나오면 바로 국립공주박물관 쪽으로 향하는 오솔길이 있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약 3~4분 간 산책하고 나니 박물관 뒤편 관사쪽으로 연결되는 후문이 있더군요. 한옥마을을 거치는 것 보다 더 아늑한 산책길로 기분 좋게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오후 2시반쯤 되었습니다.

 

   이제 차를 타고 황새바위로 이동합니다. 황새바위는 공주중학교 건너편 가톨릭 성당과 함께 위치하고 있었는데요. 천주교 대전교구의 천주교 성지 중 한 곳이라고 하네요. 조선후기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많은 분들이 순교한 장소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방문객이 많지는 않은 곳이라 사람들에 치이지 않고 경건한 마음으로 둘러 볼 수 있었습니다. 성당에서 조성해 놓은 '십자가의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니,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있고 그 중 한 나무의 주위를 따라 엄청나게 많은 십자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나무들을 조금 지나니 큰 바위 하나가 있고 다른 바위들이 여럿이 빙둘러 세워져 있었는데, 직감적으로 이것이 '황새바위'인가 싶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세워져 있는 바위 하나 하나에 박해로 숨진 당시 가톨릭 신자들의 이름과 세례명 나이 등이 새겨져 있더군요. 안타까운 것은 이름도 세례명도 없이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친 '윤 서방' '이한교의 누이' 등이 있었다는 것과 불과 10살의 어린 나이에 순교한 사람도 보였다는 것... 종교란 참 무섭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삼 순교자분들의 굳은 의지와 신념에 고개를 숙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공주의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숙소가 있는 부여로 가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점심을 컵라면으로 때운 우리는 저녁식사만큼은 부여의 맛집에서 제대로 먹어보리라 결의를 다지며 부여로 향했습니다. 물론 그만큼의 출혈은 감수를 해야 겠지요. 부여 맛집 소개와 부여 여행지 탐방은 다음 포스팅에 잇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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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박근혜 대통령이 오늘(24일) 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던 중에 본인 임기 내에 완료하는 것을 목표로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했다'는 뉴스가 속보로 전해졌습니다. 박대통령의 최근 몇 년간 개헌에 대한 입장과 180도 다른 이야기를 갑자기 꺼낸 것에 대하여 의아함과 황당함... 그리고 의혹의 시선들이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개헌선언은 왜 이 시기에 뜬금없이 나온 걸까요? 이 선언이 가지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제 [세상을 보는 눈]에 비친 박근혜 대통령의 개헌 추진 선언... 시작합니다.

 

 

1. 박근혜 대통령의 개헌 추진 목적

 

   첫째,  '국민 여망'은 개헌 추진의 구실(대의명분)일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개헌 추진의 이유로 '국민 여망'을 들었다지요? 박대통령이 국민 여망에 따라 행동한게 지금껏 뭐가 있었나요? '국민 여망'이라는 거창한 언어가 아니더라도, 국민 여론의 상식적인 반대와 합리적인 대안에도 불구하고 자격 미달, 함량 미달의 비리 국무위원 등 관료들을 통솔하여 당신 가실 길 꿋꿋하게 가시던 분 아닌가요? 이 개헌추진 선언 자체도 평소 본인 지론과 배치되어 황당하지만, 구실이 '국민 여망'이라니 더욱 의아할 뿐입니다. 

 

   둘째, 박근혜 대통령의 개헌 추진 선언은 '최순실-우병우' 이슈 전환 시도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저와 같은 평범한 국민들 중에서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분이라면 이것이 이슈 전환 시도라는 것을 모르는 분들은 아마 없으시겠지요. 박대통령 스스로 '개헌논의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밝혀 왔습니다. 불과 엇그제까지 '개헌논의가 모든 이슈를 빨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신 분이, 이제는 제발 '개헌논의를 공론화해서 다른 모든 이슈들을 빨아들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실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우리는 모두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박대통령의 선언이 나오자 마자,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들인 문재인 전 더민주 대표,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등, 여러 야권 정치인들이 이 점을 즉시 지적한 것은, 박대통령이 평소 본인 지론과 정반대의 선언을 너무도 불쑥 내놓은 그 시점과 상황이, 너무도 명확하게 '이슈의 대전환'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빤한 수라는 이야기지요.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겁니다.

 

   셋째, 박근혜 대통령의 개헌 추진 선언은 본인의 퇴임 후의 정치지형에 대한 교두보 확보를 위한 마지막 기회를 살려 보겠다는 것입니다.

   현 상황을 보면 반기문 UN사무총장이 대음 대선에서 이른바 친박 후보가 된다고 하더라도, 친박 후보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고, 어쩌면, 반 총장 본인 당선을 위해 범여권 후보를 자처하며, 박대통령과 친박 세력에 대한 비토를 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민심이 악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현 체제에서는 더 이상 '친박'이라는 세력의 미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언젠가 해야하는 개헌이라면, 박대통령 퇴임 후 보다는 지금이 박대통령과 친박에게 유리하지요. 야권이 과반이라고는 하나, 분열되어 어느 한 정당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고, 여권이 비록 총선에서 참패했다고는 하나, 공천과정에서 '진박감별' 등 수준 낮은 저질 공천을 통해 확보한 국회 내 최대 계파라는 잇점이 있는 현 시점이, 박대통령의 입장 상 개헌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집권하고 있는 이때를 차기 권력 구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장 적기이자 마지막 기회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2. 박근혜 대통령의 개헌 추진이 가지는 본질적 의미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런 박대통령의 개헌 추진이 가지는 본질적인 의미는 뭘까요? 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개헌 추진 선언이 레임덕을 인정하는 자기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선거의 여왕'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 4년 차를 맞아, 지난 5월 제 20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내심 독자개헌 가능선인 200석을 기대하던 여당이, 분열과 지리멸렬을 반복하던 야당에게 제1당을 내주는 '의문의' 참패를 당했습니다. 이에 따라 19대 국회부터 정부-여당이 추진하던 각종 (자칭) 개혁 입법이 무산되고 행정부의 국정 동력은 국회 쪽 파트너의 지원을 받기 어려워 졌죠. 

   저는 당시 박대통령이 '경제우위의 논리'를 통한 대 국회 압박 및 사정정국을 통한 국정 통제력 유지와 레임덕 방지에 나설 것이라 보았습니다. 그러나 정권 실세 우병우 민정수석 및 그의 처가에 대한 비위 의혹이 봇물 터지듯 나오고, 우 수석이 본인 처가 수준과 비슷한 수준의 비위를 갖춘 국무위원을 검증/통과시키고, 국회의 반대에도 불구 청와대는 이를 임명 강행하고, 거기에 더해서 수면 아래 가라 앉아 있던 비선실세 비리 의혹이 최순실과 그의 딸, 일해재단을 연상케 하는 미르/K 재단 의혹 등으로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면서, 이 무능한 부패정권은 사정정국을 만들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껏 나온 것이 북의 도움으로 핵안보 정국을 만들어 간 것... 그나마 비선 비위라는 쓰나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레임덕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하고 있었지요. (무능한 정권의 사정정국 실패에 따른 결과물이 바로 재벌과 MB계 비박을 동시에 잡으려던 '롯데 수사'의 용두사미 종결입니다.)

   아시겠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최근 몇 년간 평소 소신은 '경제의 중요성 때문에, 모든 이슈를 빨아들일 블랙홀인 개헌 논의는 본인의 임기 중에는 없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죠. 정치전문가들은 그러한 박대통령의 입장을 '레임덕을 거부하거나 가능한 한 늦추려고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해석해 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예 본인이 느닷없이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나온 것은, 뒤집어 이야기하면, 현 임기 시점에, 현 여야 구도에, 본인 주변의 각종 비위 혐의에, 본인과 여당의 낮은 지지도에, 모든 이러한 상황을 종합했을 때, 개헌추진 여부와 관계없이 노동법 등의 경제구조개편 등 경제 현안을 포함하는 국정 전반에 대한 동력을 이미 상실했다라고 하는 것을 자기고백하는 꼴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즉, 국민들은 이미 인지하고 있는 레임덕 상황에 대하여 박대통령이 이것을 사실상 본인도 인지하였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선언으로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며...

 

   저도 '박근혜 (대통령 어록으)로 박근혜(대통령) 반박하기' 한 번 해 보겠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재임 시, 그러니까... 2007년 무렵, '4년 중임제'를 골자로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하신 바 있죠. 이 소식이 당시 유력 대선 주자셨던 박대통령께 전해졌을때, 박대통령께서 하셨다는 그 말씀을 오늘 그대로 박대통령께 삼가 올립니다.

 

참, 나쁜 대통령이다. 국민이 불행하다. 대통령 눈에는 선거밖에 안 보이느냐. 민생경제를 포함해 국정이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 있다. 대선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개헌 논의를 하면 블랙홀처럼 모든 문제가 빨려 들어갈 수 있다. 각 정당의 대선후보가 확정되면 개헌안을 만들어 대선 공약으로 내걸고 국민의 심판을 받은 뒤 개헌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통령 눈에는 선거밖에 안 보이느냐. 민생경제를 포함해 국정이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 있다. 대선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개헌 논의를 하면 블랙홀처럼 모든 문제가 빨려 들어갈 수 있다. 각 정당의 대선후보가 확정되면 개헌안을 만들어 대선 공약으로 내걸고 국민의 심판을 받은 뒤 개헌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766982.html#csidx84937b590a00a6e959184151da49d61

 

참 나쁜 대통령이다. 국민이 불행하다. 대통령 눈에는 선거밖에 안 보이느냐. 민생경제를 포함해 국정이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 있다. 대선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개헌 논의를 하면 블랙홀처럼 모든 문제가 빨려 들어갈 수 있다. 각 정당의 대선후보가 확정되면 개헌안을 만들어 대선 공약으로 내걸고 국민의 심판을 받은 뒤 개헌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766982.html#csidx21845879d65dff38a2c64098784641f

P.S. 저는 개헌 자체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본인의 유불리와 기회-위기에 따라 개헌논의 자체를 반대하다가, 불쑥 개헌 이야기를 꺼내는 이런 행위를 규탄합니다. 개헌도 물론 중요하고, 현행 헌법의 미비사항을 보완하고 우리 국민의 기본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개헌의 내용 중 차기 권력구조에 대한 사항도 현 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면, 지금의 권력 구조 문제를 철저하게 규명하는 것이 개헌 자체 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즉, 최순실 모녀, 정윤회, 차은택, 우병우 의혹에 대한 철저한 규명과 처벌, 반성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차기 권력의 견제장치를 올바로 마련할 수 없고, 이는 곧 이런 개헌이 단순히 '권력 구조'의 '변경'을 의미할 뿐 결코 '정의로워' 지거나 심지어 '개선' 조차 될 수 없는 개헌이 된다는 것을 우리 국민이 명확히 인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더 이상 '4년 중임제' 혹은 '의원 내각제', '이원 집정부제'하의 대한민국 제7공화국에서 이 땅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제2의 최순실, 정윤회, 차은택, 우병우들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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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지난 해부터 매년 한번씩은 봄이나 가을에 아들과 단둘이 떠나는 여행을 해 오고 있는데요. 지난 해에는 봄에 가평쪽 카라반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올해에는 드디어 이번에 가을 여행으로 일정을 잡았습니다. 다음달에 2박 3일 일정으로 여수를 대중교통으로 다녀오기로 아들과 의기투합을 하고 오늘 저녁에  KTX 기차표와 숙박시설을 예약했습니다. 비록 아침 일찍 떠나는 15% 할인표를 사고 저렴한 경제형 숙소를 잡았지만, 마음만은 풍요롭습니다. 아, 벌써부터 들뜨기 시작하네요.

KTX 예매표

 

   내친 김에 여행 기간 동안 돌아볼 관광지와 먹을 음식들에 대한 대충의 목록을 잡아 보았습니다.

   ○ 돌아볼 장소

  • 자산 공원
  • 엑스포지역 - 아쿠아 플라넷 / 빅오쇼(저녁시간) / 스카이타워
  • 해상케이블카(저녁 or 야간) / 돌산 여수야경
  • 진남관 / 이순신 광장 / 천사벽화골목 (도보 이동)
  • 오동도 (음악분수)
  • 해양 레일바이크
  • 여수 미남크루즈

   ○ 먹어볼 음식

  • 추어탕 (선옥식당)
  • 간장게장 (고향민속식당)
  • 삼겹살 or 갈비 (녹원식당)
  • 회 / 낙지말이 - 팔도횟집
  • 서대회무침 / 생선구이 - 광장미가

   대충 일정 상 (자금만 된다면... ) 음식은 다 먹어볼 수 있을 듯 한데, 돌아볼 장소들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가장 중요한 기차표와 숙박 예약이 해결되었으니, 이제부터 차분히 세부 일정 계획을 짜 보고 입장권을 미리 예매하면 저렴하게 관람할 수 있는 게 있나 클릭 품을 좀 팔아 봐야 겠습니다. 아~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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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한창 가요와 팝송에 눈떠서 여러 음악을 접하기 시작하고, 카세트테이프나 LP 음반을 구입하면서, 어떤 음반들은 타이틀 곡 한 두곡을 듣고 접은 음반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음반들은 이상하게 전체 앨범을 반복해서 들으며 위안이 되기도 하고, 감동이 되기도 하였으며, 아니 그냥... 그냥 이유 없이 좋은, 듣기 좋은 음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음반이 함께 음악을 듣던 친구들과도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죠. 심지어는 매년 연말마다, 무슨 전문가라는 분들의 조사를 거쳤다는 대한민국 100대 명반이니 하는 발표를 볼 때마다, 천편일률적으로 언더그라운드 포크/락 계열의 음반들 위주로 가득 채워진 명반 순위표를 보면, 내가 좋아하는 음반들과 전혀 관계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나는 발라드도 좋아하고 뽕짝도 좋아하는데...

   생각의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기호가 달라 알려진 맛집도 내가 가서 먹어보면 별로이듯, 명반(名盤)이 라는 것도 내가 들어서 졸리면 그건 아닌 거다'

   그래서 기획해 봤습니다. 이름하여 '내 맘대로 명반' 시리즈... 연말 100대 명반에 들지 않아도,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명반은 아니더라도... 아니, 심지어는 전문가 혹은 음악 좀 듣는 다는 분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음반일지라도, '내가 듣기 좋고 내가 좋아하면 그게 바로 명반'이라는 생각으로 이 연속 기획 포스팅을 해 나갑니다.

 

[내 맘대로 명반(名盤)] 제 1탄

 

Acoustic Collabo 1집 『Unplugged』 (2011.10.10)

 

   이 음반을 고르고 나서 ‘내 맘대로 명반’ 시리즈의 기획 의도에 어울리는 음반인가를 자문해 보았습니다. 물론 이 음반이 Acoustic Collabo라는 팀을 대중적인 뮤지션으로 만들어 준 음반이지만, 주류음악은 아니고, 포크 재즈 계열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이라는 측면에서 대중성보다는 음악성이 더 돋보이는 음반이기 때문이죠. 물론 저는 근 몇 년간 100대 명반이니 뭐니 하는 것을 발표하는 걸 본 적은 없고, 이 팀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공연을 위주로 하는 팀들에 대하여 제가 잘 아는 바가 없고, 그나마 이 앨범과 이 팀의 음악들이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서, 제게도 들어 볼 기회가 있었다는 점에서, 편견 없이 그냥 제가 좋아서 선정한다는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어쿠스틱 콜라보 정규 1집『Unplugged』앨범 표지

   『Unplugged』 앨범 제작 당시엔, 기타연주와 프로듀싱, 작/편곡등을 담당한 리더 김승재, 그리고 보컬리스트 안다은으로 구성된 팀이었지만, 원래는 김승재가 주축이 되어 객원 여성 보컬을 초빙하는 방식의 프로젝트 팀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이들의 데뷔 음반 격인 첫 번째 미니 앨범 『Love Is The Key』가 나올 무렵에는 한지선이라는 분이 여성 보컬이었고,  채지연, 정진하 등의 여러 여성 보컬들이 첫 미니 앨범과 이후의 디지털 싱글, 그리고 각종 공연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객원보컬이 갖는 한계는 공연 때마다 보컬이 바뀌고 일정 조정이 안되어 펑크도 날 수 있는 것이었죠.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우리가 잘 아는 보컬리스트 안다은씨가 정규 맴버로 참여하게 됩니다. 음반으로 보면, 안다은씨는 이 1집 정규 앨범이 나오기 전에 이 앨범의 수록곡이기도 한 『한여름밤의 꿈』 디지털 싱글부터 참여하기 시작했다고 하죠.

어쿠스틱 콜라보 첫 2인조 정규멤버 김승재 안다은어쿠스틱 콜라보의 첫 2인조 정규멤버인 김승재씨와 안다은씨입니다.

   이 1집 정규 앨범은 『한여름밤의 꿈』 디지털 싱글이 나온 뒤 약 3개월 뒤에 출반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곡은 기존에 발표된 미니앨범과 디지털 싱글을 모아서 수록된 것이었고, 추가된 신곡은 첫 번째 트랙인 「Prologue」, 네 번째 트랙 「그대와 나, 설레임」, 여섯 번째 트랙 「My Foolish Heart」 뿐이었습니다. 첫 번째 트랙은 인트로 뮤직이고, 여섯 번째 트랙은 유명한 팝재즈 넘버의 리메이크이므로 실질적인 신곡은 네 번째 트랙이 유일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 트랙 「그대와 나, 설레임」이 기대를 넘어서는 히트를 하며 이들에게 많은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1집 정규 앨범의 특징으로 인해 이 앨범은 이들 음악의 주축으로서의 김승재의 화려한 기타 테크닉이 어쿠스틱 재즈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음악적 중심을 잡아 주면서, 다채로운 여성 보컬리스트들의 음색이 콜라보레이션으로 어우러져 다른 뮤지션들에게서 볼 수 없는 어쿠스틱 콜라보만의 매력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 시기의 어쿠스틱 콜라보는 그야말로 팀 이름 ‘Acoustic Collabo’에 걸맞는 음악적 색채를 가지던 시기였다 할 수 있겠습니다.

각 곡별 Credits

 

1. Prologue (0:50)
작곡: 김승재 / 편곡: 김승재
코러스: 소울맨 / 녹음: 장민 / 믹스: 홍성준

2. 사진 (3:40)
작곡: 김승재 / 작사: 김승재 / 편곡: 김승재
코러스: 소울맨 / 녹음: 장민 / 믹스: 홍성준

3. Waiting for U (3:13)
작사: 윈드밀 / 작곡: 윈드밀, 김승재 / 편곡: 김승재
하모니카: 권병호 / 보컬: 채지연 / 녹음: 심소연 / 믹스: 홍성준

4. 그대와 나, 설레임 (3:36)
작곡: 윈드밀 / 작사: 윈드밀 / 편곡: 윈드밀
코러스: 소울맨 / 녹음: 김한별, 장민 / 믹스: 홍성준

5. Forest (4:06)
작곡: 김승재 / 편곡: 김승재
녹음, 믹스: 임진선

6. My Foolish Heart (3:52)
작곡: YOUNG, VICTOR / 편곡: 이윤석
피아노: 송지혜 스트링: 융스트링
녹음: 김한별 / 믹스: 홍성준

Original Title: MY FOOLISH HEART
Original Writer: YOUNG, VICTOR / WASHINGTON, NED
Original Publishers: CHAPPELL & CO.
Sub-Publisher: Warner/Chappell Music Korea Inc.

7. 한 여름 밤의 꿈 (3:42)
작곡: 윈드밀 / 작사: 윈드밀 / 편곡: 윈드밀
코러스: 소울맨 / 녹음: 김한별 / 믹스: 홍성준

8. Love Valentine (3:02)
작곡: 김승재 / 작사: 이윤석 / 편곡: 윈드밀, 김승재
피아노: 심태현 / 드럼: 김승호 / 베이스: 한가람 / 코러스: 소울맨
녹음: 김한별 / 믹스: 홍성준

9. Promise (3:50)
작사: 김승재 / 작곡: 김승재 / 편곡: 김승재
코러스: 소울맨 / 보컬: 채지연 / 녹음: 심소연 / 믹스: 홍성준

10. My Dear (3:16)
작사: 김승재 / 작곡: 김승재 / 편곡: 김승재
보컬: 한지선 / 녹음: 심소연, 김한별 / 믹스: 홍성준

11. My one and only love (2:51)
작곡: Guy Wood, Robert Mellin / 편곡: 김승재
보컬: 정진하 / 녹음: 김한별 / 믹스: 홍성준

Original Title : My One and Only Love
Original Writers : Guy Wood / Robert Mellin
Original Publisher : Sherwin Music Publishing Corp / EMI Music Publishing Ltd
Sub-Publisher : EMI Music Publishing Korea

12. Ocean (2:23)
작곡: 김승재 / 편곡: 김승재
녹음, 믹스: 임진선

13. Sweet Love (3:12)
작곡: 윈드밀, 김승재 / 작사: 감성현 / 편곡: 윈드밀, 김승재, 심태현
피아노: 심태현 / 드럼: 김승호 / 베이스: 한가람 / 코러스: 소울맨
녹음: 김한별 / 믹스: 홍성준

14. My Foolish Heart (Inst.) (3:52)

15. Sweet Love (Jazz ver.) (3:12)
피아노: 심태현

(원본 소스 : Maniadb)

   첫 번째 트랙 「Prologue」는 상큼한 기타 리듬에 손뼉을 치는 듯한 경쾌한 비트, 그리고 안다은의 허밍과 소울맨의 코러스가 만나 기분 좋은 앨범의 시작을 알립니다. 가벼우면서도 부드러운, 부담없이 들을 수 있는 인트로 음악입니다.

   두 번째 트랙 「사진」은 헤어진 연인에 대한 기억을 사진을 통해 떠올리는 내용의 가사인데 비교적 힘있고 경쾌한 기타 터치로도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김승재의 주법이 돋보이는 곡입니다. 물론 안다은의 허전함과 애련함이 묻어 나오는 듯한 음색이 있기에 가능했겠지요. 전작(前作)인 『한여름밤의 꿈』 디지털 싱글에서 처음 소개되어 팬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한 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 번째 트랙 「Waiting for U」는 사랑이 지나간 후의 아픔이 담담한 톤의 보컬에 실려 전해지며 후주 부분의 권병호씨의 하모니카는 듣는 이에게 헛헛한 여운을 안겨 줍니다. 채지연씨가 보컬리스트로 참여한 곡이라고 하는데요. 데뷔 미니앨범을 안 들어 봐서 그 동일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감정을 절제한 듯한 창법이 이 곡과 잘 어울리는 음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다은씨의 호소력 있는 창법과는 다른 또 다른 매력이 있네요.

   네 번째 트랙은 바로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그대와 나, 설레임」이라는 곡입니다. 이 곡은 이 앨범을 프로듀싱한 윈드밀의 작품으로서, 이 앨범 전체적인 코러스를 맡아 준 보컬리스트 소울맨이 안다은씨의 듀엣 파트너로 참여한 곡입니다. (공식적으로는 듀엣이 아닌 featuring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김승재의 상큼한 기타 주법과 청아한 안다은의 보컬, 그리고 소울맨의 감성적 음색이 이제 막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있는 예비 연인들의 설레임(요즘 용어로 썸탄다고 하나요?)을 절절히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트랙은 「Forest」라는 곡으로 기타 연주 이외에는 보컬도 등장하지 않고 다른 악기도 등장하지 않는 어쿠스틱 기타 솔로곡입니다. 김승재가 작곡하고 기타 편곡하여 연주한 김승재에 의한 김승재의 곡이지요. 평온하고 잔잔한 기타의 선율 속에 빠져들다 보면, 따스한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청량한 숲 속을 거닐며 숲이 주는 신선한 공기와 분위기를 맘껏 누리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듭니다.

   여섯 번째 트랙 「My Foolish Heart」는 1949년 동명의 헐리우드 영화와 함께 발표된 곡을 리메이크한 곡입니다. 앞의 트랙은 김승재의 독무대였지만, 이 트랙에 김승재가 참여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쿠스틱 기타가 빠져 나간 자리는 피아노와 현악(스트링)만이 연주를 이끌어 가고 있는데, 아름다운 멜로디와 함께 애절함이 듬뿍 묻어 나는 안다은의 보컬이 가미되어 클래시컬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피아노와 첼로만으로도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이 나올 수 있구나’하고 감탄하게 된 곡이지요. 반주만으로도 아름다운 곡이라고 제작자들도 생각해서였을까요? 뒤에 연주곡(MR)으로도 수록된 곡입니다. (현악단 부르는 비용이 워낙 高價여서 아까운 마음에 재탕 수록한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일곱 번째 트랙 「한 여름밤의 꿈」은 꿈결처럼 지나간 사랑을 그리며 아파하는 마음을 안다은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노래하는 곡입니다. 김승재는 그저 튀지 않는 조력자로서의 반주를 들려 주며, 소울맨의 코러스도 이와 비슷하게 안다은의 보컬을 뒷받침해 줍니다.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만한 전형적인 발라드로서, 최근의 어쿠스틱 콜라보(현 이름 디 에이드)의 음악적 성향과 맞닿아 있는 곡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여덟 번째 트랙 「Love Valentine」은 사랑에 실패한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다가온 새로운 사랑에 다시 용기를 내어 사랑을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을 경쾌한 리듬에 실어 노래하고 있습니다. 2010년 11월에 발매한 디지털 싱글 『Valentine Makes Sweet Love』에 수록되었던 곡으로서, 보컬이 안다은씨가 아닌 다른 분으로 추정되는데, 누구인지는 현재 알 수 없습니다.

   아홉 번째 트랙 「Promise」는 떨어져 있는 연인과 함께할 시간을 그리며 영원한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을 가진 깔끔한 느낌의 곡입니다. 채지연씨의 보컬이 순수하고 담백한 곡의 느낌을 잘 살려 주고 있네요. 마치 1980년대, 90년대의 장필순씨의 보컬을 듣는 듯한 착각을 주는 곡이었습니다.

   열 번째 트랙 「My Dear」는 잃어 버린 사랑을 홀로 힘들어 하는 여인의 심정을 보컬리스트 한지선씨가 때로는 덤덤하게, 때로른 격정적인 보컬로 표현해 줍니다. 한 곡 안에서 이렇게 감정의 격차를 나타내면서 곡을 표현한다는 게 쉬운 건 아닐텐데, 한지선씨의 보컬에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극대화 시키는 힘이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곡에 따라 적절한 보컬을 초빙하는 여성 객원 보컬 시스템의 장점이 잘 묻어 나는 곡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열한 번째 트랙 「My One And Only Love」은 Guy Wood, Robert Mellin의 유명한 재즈 곡을 어쿠스틱 콜라보만의 감성으로 재탄생 시킨 넘버입니다. 김승재의 기타 편곡은 어쿠스틱 기타 재즈의 진수를 보여 주며, 객원 싱어 정진하의 재즈 보컬 실력 또한 수준급이어서 원곡에 뒤지지 않는 어쿠스틱 콜라보 버젼만의 매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열두 번째 트랙은 「Ocean」이라는 곡으로서, 「Forest」와 같이 김승재의 기타곡 작/편곡 실력을 느껴볼 수 있는 어쿠스틱 기타 솔로곡입니다. 대양(大洋)의 웅장함과 격랑(激浪)의 거칠음을 현란한 기타 주법으로 표현해 냅니다.

   열세 번째 트랙 「Sweet Love」는 발렌타인 데이를 맞아 사랑하는 연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고백하려는 마음을 재즈 피아노의 선율에 담아 달달하게 녹여내고 있는 곡입니다. 역시 디지털 싱글 『Valentine Makes Sweet Love』에 수록되었던 곡으로서, 보컬이 누구인지 궁금하네요.

   열네 번째 트랙 「My Foolish Heart (Inst.)」과 열다섯 번째 트랙 「Sweet Love (Jazz ver.)」은 보컬 수록곡들의 MR을 수록한 곡들입니다.

   지금까지 Acoustic Collabo의 정규 1집 『Unplugged』 앨범 전 곡에 대한 리뷰를 해 봤습니다. 각 곡마다 정규 보컬 혹은 객원 보컬들의 음색과 곡이 잘 맞아 곡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앞에서 잠시 뒤로 미루었던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이 앨범은 「그대와 나, 설레임」의 대성공으로 팀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 시발점이 됩니다. 이 앨범의 성공은 팀의 대중적 인지도, 특히 보컬 안다은씨의 인지도를 높이게 되는데요. 당초 팀의 주축이자 음악적 성향을 주도했던 김승재씨 못지 않게 안다은씨의 팀 내 입지가 강해지게 됩니다. 이후 꾸준히 '첫사랑 시리즈' 등 EP음반들을 발매하고 프로젝트 음반에 참여해 오면서, 「바람이 불어오네요」, 「사랑이 멀어져가」 등 주옥같은 곡들을 잇달아 내놓으며 대중에게 점점 더 다가가지만, 데뷔 시기의 어쿠스틱 재즈적인 감성은 점차 그 비중이 줄어들고 그 자리를 대중 음악적인 성향이 차지하면서 절대적이었던 김승재라는 아티스트의 팀 내 존재감이 점차 줄어들게 됩니다.

   결국, 안다은씨가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2013년 김승재씨의 팀 탈퇴로 인해, 해산 위기를 맞지만, 해외에서 재즈기타를 수학(修學)한 유학파 우디 킴 (한국명 김규년)이 새 맴버로 참여하여 활발히 활동해 오다가 최근 소속사로부터 독립하여 디 에이드(The Ade)라는 새로운 팀 이름으로 활동을 재개하였다고 하네요. 최근의 음악들은 상당히 발라딕하고 감성적이고 대중음악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는데요.

어쿠스틱 콜라보의 두번째 정규멤버 안다은 우디킴어쿠스틱 콜라보의 두번째 정규멤버 안다은씨와 우디킴씨입니다. 이 분들은 현재 전 소속사에서 독립하여 The Ade 라는 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승재씨는 김승재씨대로 어쿠스틱 콜라보 탈퇴 후 유지인이라는 새 정규 여성 보컬을 맞아 멜로우스푼(Mellouspoon)이라는 팀으로 약 2년 여 활동하다가 여성 싱어의 탈퇴로 현재는 활동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이제 어쿠스틱 콜라보라는 원래 팀의 색채는 한때 김승재씨가 자신의 음악적 영역을 구축하고 이를 노래로 표현해 주던 안다은씨 및 객원 여성 보컬들과의 콜라보를 통해 완성해 내던 이 시기의 음악들로 영원히 남게 되었네요. 특히 그것을 집대성하여 정규 앨범으로 모아 낸 이 『Unplugged』 앨범의 가치는 김승재씨가 이 프로젝트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한, 이제는 다시 마주할 수 없기에 그래서 더욱 빛나는 명작으로 남을 것입니다.

Posted by true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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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사무실 MacOS를 El Capitan에서 Sierra로 업그레이드  했습니다.  Sierra에서는 Mac용 Siri를 사용할 수 있다는군요.  뭐 사무실 컴퓨터에는 어차피 마이크도 없고...  사무실에서 시리와 이야기 하느니 차라리 사무실 벽을보고 이야기 하겠다는 잡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약 15분간의 업그레이드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업그레이드를 완료한 Sierra의 모습...은 아름다웠지만,  뭔가 거추장스럽고 끈적끈적한 증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네트워크 윈도우 공유 폴더에 접근할때마다 사용자 이름과 암호를 매번 물어보는 증상이었는데요.  아래 그림처럼 말이죠...

네트워크 서버 암호 확인 창

 

그전  El Capitan까지만 해도 Apple Script 편집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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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nt volume "smb://192.168.0.2/Share" 
cs

와 같은 내용을 넣고 스크립트 실행파일을 만들어 주고 로그인 시에 시동되는 프로그램으로 등록해 주면,  /Volumes 폴더에 해당 마운트지점(/Volumes/Share)이 자동 생성되고 여기에 마운트가 가능했습니다.  물론 사용자 이름과 비밀번호는 처음 한 번 입력해 주면 키체인에 저장되어 다시 입력할 이유가 없었죠.  저처럼 로그인 자동실행까지는 아니어도 위와 같은 명령이나 GUI로 윈도우 공유폴더를 마운트 해 쓰시던 분들이 많을 겁니다.

    '왜 이러지?'하며 열심히 구글링을 해 보니, 애플 개발자 포럼인가 하는 커뮤니티에 이르기를...  '애플이 MacOS 10.12 Sierra부터 일반사용자의 /Volumes  마운트를 막는 정책을 써서 그런 현상이 있다'네요.  그 해결책(workaround)으로 '사용자의 홈폴더 밑에 마운트지점을 만들고 여기에 마운트를 해서 쓰라'는 권고를 해 주네요.

    하지만,  저는 소시적에 리눅스를 만지면서 수세리눅스 데스크톱 제 홈폴더에 네트워크 공유폴더를 마운트 해서 쓰다가...  나중에  홈폴더의 설정이 꼬여서 열받은 나머지 아래와 같은 명령어를 날린 적이 있습니다.

(아래 명령어는 절대로 아무 생각없이 복사해서 배시 셀에 붙여넣기 하고 엔터를 누르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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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m -rf ~/*
cs

   이런 짓을 하는 것은 남들의 경험담에서만 보는 건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ㅠㅠ 그 후로 오랫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공유폴더의 자료들을 어느  정도 다시 모은 후에는 리눅스의 시스템 쪽 폴더  (/mnt  랄지  /media  같은...)  아래에 제 마운트 포인트를 만들고 제 홈폴더 밑에는 마운트 포인트로 가는 소프트링크를 걸어  놓고 사용하는 것을 철칙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제 사용자 계정으로 홈폴더에서 무슨 망나니같은 짓을 해도 최소한 소중한 자료가 모여 있는 네트워크 폴더들은 무사하도록  해 놓은 것이죠.

     MacOS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에는 mount volume  옵션 명령으로 시스템 폴더인 /volumes폴더를 사용해 왔다면 이제는 굳이  (애플이 원하지 않는)  /Volumes 폴더를 마운트포인트로 쓸 것이 아니라, 홈폴더 쪽이 아니더라도 다른 폴더를 만들어서  제 목적을 달성하면 되겠지요.  그런데 Mac에서 쓸  일이 없는 폴더이름을 만들어야 겠습니다.  나중에 혼동되지 않으려면요...

    그래서 /Mount 라는 폴더를 한번 만들어 봅니다. 유닉스/리눅스에서라면 /mnt가 있는데, 맥에서는 현재 활성화되지 않아서 동일한 이름을 만들어 쓰면 될 것 같지만, 혹시 몰라서 이 이름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 /Mount 폴더 아래에 제가 공유폴더로 쓰는  폴더들의 이름으로 하위폴더들을 만들어 줍니다.  그 중 하나의 이름이 'Share'라면 아래와 같겠지요. 한꺼번에 아래와 같이 만들어도 되겠네요. 터미널을 열고 아래와 같이 작업합니다.

1
$ sudo mkdir -p /Mount/Share
cs

그리고 ' Share'폴더의 소유권을 내 것으로 바꿔 줍니다.

1
sudo chown 내계정명:Staff /Mount/Share
cs


이제 홈폴더 밑에 소프트링트들을 저장할 폴더 하나를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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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kdir ~/Netfolder
cs

Netfolder로 들어가서 위에서 만들어 놓은 'Share'폴더로 향하는 소프트 링크를 만들어 줍니다.  (제 경우는 /Volumes/Share 폴더로 향하던 소프트링크 파일을 삭제하고 새로 만들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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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n -s ../../../Mount/Share Share
cs

이제 아래와 같은 명령어로 네트워크 공유폴더를 마운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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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unt -t smbfs //사용자이름:비밀번호@서버주소/Share
cs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애플이 더  이상 시스템폴더 마운트포인트에 네트워크 공유 암호를 키체인에서 자동으로 불러 들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시스템폴더 쪽을 마운트포인트로 쓰면서도 사용자 이름과 암호를 계속 물어보는 현상을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위와 같은 명령을 스크립트로 만들어서 쓸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사용자이름과 비밀번호는 우리 네트워크 공유폴더의 사용자이름과 비밀번호입니다.

'Launchpad-기타'에 있는 '스크립트 편집기'를 실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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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y
    do shell script "mount -t smbfs //사용자이름:비밀번호@서버주소/Share /Mount/Share"
end try
cs

라고 입력하고 이름을 'Mount Net Folder'로 바꿔 준 뒤 저장해 줍니다.

이 스크립트 파일을 실행파일로 전환해 주기 위해 상단 메뉴어서 '파일-보내기'를 선택합니다.

보내기 대화창이 열리면  아래 그림과 같이 '다음으로 보내기' 옆에 'Mount Net Folder'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아랫쪽 '응용프로그램'  폴더를 저장폴더로 하고 '파일포멧'은  '응용프로그램'으로 선택해 주시고,  '실행전용'란에 체크표시해 주고 저장을 눌러 줍니다. 아래 그림을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애플스크립트 보내기 창의 확장

 

이제 응용프로그램 폴더에 우리가 만든 'Mount Net Folder' 앱이 생겼습니다.  이 녀석을 로그인 시 자동 실행되도록 해 봅시다.

바탕화면 아래 독에 '시스템 환경설정'을 엽니다.  '사용자 및 그룹'을 선택하시고  현재 사용자가 본인의 사용자 계정임을 확인하시고 오른쪽의 '로그인 항목'을 클릭합니다.

창 아랫쪽 자물쇠 버튼을  눌러 잠금 해제를 해준 후, '+'를 눌러 우리가 만들어 준 'Mount Net Folder' 앱을 등록시켜 줍니다.

이제 재부팅하여 네트워크 폴더가 사용자이름,  암호를  물어보지 않고 잘 마운트 되는지, 링크는  제대로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합니다.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이제 부팅하여 로그인할 때마다 우리 네트워크폴더는 자동으로 마운트 될 것입니다.


참고

   암호에 특수문자 (e.g. &, #)가 포함되어 있는 경우  'URL Encoded Characters'로 변환해 주어야 정상적으로 마운트 됩니다.  예를 들어 암호가 123$56&8인 경우 아래와 같이 스크립트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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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y
    do shell script "mount -t smbfs //사용자이름:123%2456%268@서버주소/Share /Mount/Share"
end try
cs

Posted by true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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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토요일에 가을 주말을 맞아 처형네 부부가 저희 집에 와서 저희 가족과 함께 인근 갯골 생태공원에 가을 나들이를 갔습니다. 지난 주말 만큼만 날씨가 화창했으면 좋았겠지만, 어제 짙게 드리워져 있던 미세먼지가 조금은 남아 있어, 약간은 뿌연 느낌이 나는 토요일이었습니다. 정오 무렵에 도착해서인지 아직 사람과 차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주차장 옆에 있는 잔디운동장 한 켠에는 다음주 화요일에 녹화를 진행한다는 KBS 열린음악회의 무대로 보이는 설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간단하게 싸간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산책에 나섰습니다. 가을 햇살은 따스했고 걸으면 약간은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그런 날씨였습니다.

 

   이런 조형물들은 아이들이 타고 놀기 좋아하는 것들인데 아직 한산하네요.

 

   염전체험과 소금창고를 둘러 볼 수 있는 곳도 있습니다. 이 곳이 예전에는 갯벌지역으로서 염전이 있었다고 하네요. 아래 사진 오른쪽 중간 쯤에 스크류 원통 모양의 구조물이 보이시나요? 바로 공원 전망대라고 합니다. 오늘 산책의 목적지는 저 곳입니다.

 

   옛 갯벌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도 남아 있습니다. 마치 바닥을 드러낸 강 같군요.

 

   이런 산책로도 만들어 놓았네요. 나무만 더 우거지면 드라마나 영화 촬영 장소로도 손색 없을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꽤 넓군요. 헥헥…

 

   드디어 목적지인 전망대가 눈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삐뚜루 찍었나?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져 보이네…?

 

   전망대 부근에서 드넓게 펼쳐진 갈대밭과 그 너머에 보이는 인천 쪽을 사진에 담아 봤습니다.

 

   전망대 지층(1층)에는 이런 큐브 모양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네요.

 

   꼭대기에 올라가 보이는 전망을 사진에 담습니다. 인천 쪽이구요…

 

   장곡동, 장현동 방면…

 

   아까 사진에 담았던 염전 체험장과 소금창고 전경입니다. 앞쪽으로 여름에 수영장으로 쓰이는 곳도 눈에 들어 오네요.

 

   잔디공원 옆으로 흐르는 갯벌이 마치 강물 같습니다.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면서 눈에 띈 물고기 조형물 사진을 한 컷 더 찍어 봤습니다. 안녕~ 물고기야. 난 이제 아들과 야구놀이, 배드민턴 놀이 하러 가야 한단다. 나중에 또 보자,

Posted by true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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